[오마이뉴스 제공]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17대 원구성 협상이 교착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두 가지 핵심쟁점은 법사위원장 배분과 예결산위원회의 상임위화이다. 자체적으로 상임분과위원들을 내정하는 열린우리당의 압박작전에 한나라당은 "마지노선에서 물러설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참을 만큼 참았다."
"그 동안 인내했다."
14일 오전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장에서 천정배 원내대표와 이종걸 수석부대표가 각각 내뱉은 말이다. 국회의장단 선출을 제외하고는 한나라당과의 협상에서 진전된 것이 없고, 한편으로는 "원내 과반수를 가진 여당이 무기력하다"는 당내외의 따가운 질책에 따른 고충을 반영한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여당 몫의 상임위원 명단을 자체적으로 발표했다. 정책조정위원회별로 "거칠게" 이뤄졌던 당정협의도 각 상임위 별로 세분화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정청래 부대표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문제도 국회 개원 전 건교위가 구성돼 전문성 있는 의원들이 당정협의에 나섰다면 지금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과의 협상을 떠나서 "일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향후 협상에도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한나라당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남경필 수석부대표는 오후에 기자들을 만나 "저쪽(열린우리당)에서 전화를 걸어와도 새로운 내용이 없으면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 이건 압박이 아니라 오만이다. 그런 식으로 자기들끼리 하면 국회가 무슨 필요가 있냐?"고 쏘아붙였다.
이런 냉기류에도 불구하고, 상임위 배분 협상은 상당히 진척된 상황이다. 통일외교통상위원회와 국방위, 행정자치위, 문화관광위는 열린우리당의 몫으로 돌아가고, 민생경제와 밀접한 정무위, 산업자원위, 과학기술정보통신위, 보건복지, 환경노동위 등은 한나라당 몫이라는 분석이다. 열린우리당은 여성의원들을 의식해 이미경 의원에게 위원장직을 배분하려던 교육위까지 한나라당에 내주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본회의에 앞서 법안 심의의 관문 역할을 하는 법사위원장이 어느 당에 속하느냐이다. 열린우리당은 법사위원장을 17대 전, 후반으로 나누어 한나라당과 나눠 운영하려던 협상카드까지 철회하고 한나라당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그 동안의 관례를 따르면 열린우리당이 법사위원장을 맡는 게 맞다. 국회내 다수를 차지한 역대 여당들이 야당에게 법사위원장을 양보한 적이 없고, 16대 국회에서도 여당(민주당)이 국회 다수를 차지한 한나라당의 위세에 눌려 법사위원장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당이면서 국회 과반수를 차지한 열린우리당이 법사위원장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이다.
이런 명분 이외에도 열린우리당에게는 법사위 획득의 당위성을 떠올리게 하는 "안 좋은 기억들"이 있다. 올해 초 일제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이 누더기 상태로 통과되고, 국가보안법 개폐 등 각종 개혁입법 논의가 번번이 가로막힌 곳이 법사위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이 16대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위원을 맡았던 것도 당내에서 "법사위를 양보하면 되는 일이 없다"는 인식을 부채질하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법사위를 놓치면 열린우리당의 독주체제를 막을 수 없다는 우려를 안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상임위에서 비교섭단체 의원들의 협조만 얻어내면 한나라당을 따돌리고 본회의까지 법안을 일사천리 통과시키는 것은 식은죽 먹기가 된다.
한나라당 수석부대표를 맡고있는 남경필 의원은 이날 오후 기자들을 만나 "열린우리당이 법사위원장을 가져가려는 것은 국회 내에 어떠한 장애물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회를 독일의 아우토반 같은 프리웨이(고속도로)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법사위라는 교통경찰을 둬야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법사위원장을 가져가게 되면 각종 법률안 통과가 무력화된다"는 열린우리당의 논리도 "엄살"에 불과하다는 반응이다. 남 의원은 "열린우리당 소속 배기선 문광위원장의 거부로 KBS 수신료 분리징수안이 관철되지 못한 것을 놓고 유사한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는데, 열린우리당이 마음만 먹으면 국회의장 직권으로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또 하나의 쟁점사안인 "예결위의 상임위 전환"은 한나라당이 일단 키를 쥐고 있지만, 열린우리당은 "원구성 협상과 연계시킬 사안이 아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결위의 상임위 전환"을 당론으로 채택한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에 비판적으로 돌아선 것도 열린우리당에 호재로 작용한다.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국회를 정상화시키면 국회개혁특위에서 최우선 과제로 논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한나라당은 거꾸로 상임위화를 약속해야 국회를 열겠다고 떼를 쓰고 있다"며 한나라당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예결위의 상임위화가 쟁점으로 부각될수록 손해를 볼 게 없다는 게 한나라당의 판단이다. TV토론을 줄곧 제의해온 남경필 수석부대표가 이날도 토론을 다시 제의한 것은 이 같은 자신감에 기반한 것이다.
남 부대표는 "양쪽의 논쟁은 시기 문제가 아니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만나봐야 똑같은 주장을 하려면 차라리 냉각기가 필요한 게 아닌가?"라며 협상 장기화에 대비하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은 이날 별도로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 수박겉핥기식 예결산 심사 개혁 ▲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영과 도덕적 해이의 차단 ▲ 예결위의 전문성 강화 ▲ 대부분의 선진국이 예결산 상임위를 운영하는 것을 들어 상임위화를 재차 주문했다.
박근혜 대표가 오전 회의에서 "이 부분만은 한나라당이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것도 예결산 상임위 운영을 통해 정부를 통제하려는 한나라당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야 대치국면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번 주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교섭단체 대표들의 연설과 대정부 질문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