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억 규제의 역설]10년째 제자리…'집 가진 죄인' 늘었다

낮은 고가주택 기준에…실수요자들 '아우성'
9억 넘는 분양주택 중도금 대출 금지
실수요자들 포기로 청약 미달 사태
부동산시장 '부익부 빈익빈' 심화
  • 등록 2019-03-12 오전 4:29:30

    수정 2019-03-12 오전 4:29:30

서울 강남권 재건축 단지 가운데 ‘대장주’로 꼽히는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아파트 전경.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경계영 기자] 9억원. 주택시장에서 9억원은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 숫자다. 고가 주택으로 보는 기준이어서다. 아파트 청약시엔 분양가 9억원이 넘는 주택은 중도금 대출이 안된다. 9억원이 넘는 아파트는 다자녀·신혼부부·노부모부양 등 정책·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따로 배분하는 특별공급 물량도 없다.

집을 살 땐 9억원 초과 주택은 중개보수를 0.9% 이하에서 협의 조정토록 돼 있다. 9억원 이하 상한이 최고 0.6%인 데 비해 높은 수준이다. 매매값 9억원 이상 주택은 취득세율도 3%로 6억~9억원 구간보다 1%포인트나 높다. 세제상 공시가가 9억원을 넘으면 1가구 1주택자는 종합부동산세뿐 아니라 양도소득세도 매매차익분에 부과한다.

이렇다보니 9억원을 기준으로 주택시장이 양극화하고 있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9억원은 고가 주택을 결정 짓는 기준으로 중도금 대출, 종부세 등 정부 제도가 정해지다보니 시장이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나뉜다”며 “부동산 시장에서 고가 주택을 보는 바로미터”라고 말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대출 막았더니, 현금부자만 아파트 ‘줍줍’

9억원 이상 고가 주택은 매매할 때 주택을 담보로 대출 받기 쉽지 않다보니 그 기회는 현금 부자에게 돌아갔다. 강원경 KEB하나은행 대치동골드클럽지점 PB센터장은 “VIP 고객은 종전엔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금 비중이 10%가량이었다면 최근 들어 20~30%까지 높아졌다”며 “미·중 무역전쟁 불안, 대북 제재 문제 등으로 주식 등 금융투자상품에 선뜻 투자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부동산 관련 투자 기회를 엿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사 한 PB는 “대학생이나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자녀를 둔 고객은 증여를 염두에 두고 자녀가 결혼할 때쯤 입주시기가 다가오는 재건축 아파트에 관심을 둔다”며 “강남권 주요 지역 내 재건축 아파트 단지의 가격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9억원 이상 고가 주택은 ‘그림의 떡’이 된 사람들도 상당하다. 대출 레버리지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서민층, 1주택자의 갈아타기 수요 등은 사실상 부동산 투자가 차단된 셈이다.

은행 PB센터의 한 관계자는 “자산가는 대출 규제 영향을 전혀 받지 않다보니, 동향을 파악하다가 적절한 가격이다 싶으면 사들이지만 자산 없이 소득만 있는 근로자는 대출 규제 때문에 집 장만이 어려워 선택의 기회조차 박탈 당했다”며 “강남이 더 오를 지역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금부자만 사면서 ‘부익부 빈익빈’만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봤다.

무주택자 중심으로 청약제도가 개편됐지만 9억원이라는 중도금 대출 규제는 현금 동원력을 갖춘 계층과 아닌 계층으로 갈랐다. 지난해 강남권 청약에서 이 같은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미계약분 26가구가 나왔던 서초구 ‘래미안 리더스원’ 잔여가구 모집엔 무려 2만3000여명이 몰렸다. 중도금 대출이 안되지만 청약통장이 필요 없다보니 현금 부자는 다 몰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들만의 리그’인 셈이다.

김은진 부동산114 리서치팀장은 “실수요자를 위해 청약제도가 개편됐다고는 하지만 중도금 대출이 불가능해 돈 있는 사람만 새 아파트를 가져간다”며 “서울에서 웬만한 아파트는 분양가가 9억원 아래로 나오는 물량이 많지 않아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특별세’ 아닌 ‘보통세’ 된 종부세

9억원이라는 고가 주택 기준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가 주택에 부과하는 종부세를 공시가 9억원(1주택자 기준)으로 재정비한 2008년 당시엔 대치동 은마, 잠실 엘스 등 강남권 아파트가 9억~10억원 언저리에 거래되던 시기였다. 사실상 이 아파트도 종부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강남권 아파트 평균 시세는 15억~17억원에 이른다. 시세가 달라졌는데도 과세 기준은 10년째 제자리인 셈이다. 실제 2017년 종부세 대상자는 39만7000명으로 전년 대비 18% 급증했다.

KB국민은행 ‘리브온’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중위값 역시 2008년 12월 4억8084만원에서 지난 2월 8억3859만원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10년 전 매매값 9억원이면 ‘비싼’ 주택이지만 지금 서울 절반가량이 9억원을 넘는다. 9억원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얘기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기준을 그대로 두다보니 고가 주택에만 부과하던 특별세인 종부세가 ‘보통세’가 돼버렸다”며 “부과 기준을 시세에 맞춰 수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영진 빅데이터랩장은 “양극단으로 주택시장이 벌어지는 가운데 지역 평균 아파트값에 따라 주택담보대출 기준을 다르게 둔다든지, 생애 최초 주택 구입자나 맞벌이 부부에 대한 소득 기준 완화 등 정책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부분적으로 손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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