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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송이라 기자] 바야흐로 쿡방이 대세다. 맛깔나는 음식을 척척 해내는 셰프들이 방송가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연예인의 남편, 성공한 사업가로만 알려졌던 ‘백주부’ 백종원씨는 요리실력에 입담까지 더해져 말그대로 예능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잘나가는 셰프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모두 ‘남자’라는 점이다.
“새아가야, 다른 건 다 해도 절대 남편을 부엌에 들이지 말거라. 남자가 부엌에 들락날락하면 딸 낳는단다” 얼마전 결혼한 친구가 남편 고향에 내려가서 시할머니에게 들은 말이란다. 남자를 절대 부엌에 들이지 말라는 할머니와 방송가를 휘젓고 있는 남자 요리사들. 전혀 다르지만 모두가 한 시대를 살고 있다.
엄마가 되고난 이후 가장 괴로운 게 바로 요리다. 결혼 전까지 나는 요리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끼니 때마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었고 가끔 설거지나 하면 예쁜 딸이라고 칭찬받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둘 다 살림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안해본 살림 무능력자들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요리를 못하는 건 내게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신혼 때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블로그에 나온 레시피대로 가끔 요리해서 분위기를 냈고 사이좋게 요리와 설거지를 나눠 했다. 서로 바빠 함께 앉아 밥해먹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두번이 다였다. 요리는 주로 내가 했다. 남편이 요리를 안하는 게 가끔 불만이었지만 나도 거의 안했기에 딱히 싸울일은 없었다. 김치와 각종 장류, 반찬들은 시엄마와 친정엄마가 경쟁하듯 날라다 주셨다. (생각해보니 아빠들이 음식을 챙겨준 적은 없었다)
이유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일말의 설렘이 있었다. 쌀을 불리고 고기와 야채를 다져서 죽을 쒀 내새끼가 오물오물 먹는걸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활동 반경이 넓지 않은 아기와 단순한 재료 몇가지로 간을 할 필요도 없는 이유식은 나름 만들만했다.
하지만 돌이 지나고 아이가 하루 세 끼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다양한 반찬과 요리들을 척척 해내는 건 나에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야채 채써는데만도 하세월인 내 요리실력으론 음식 하나 하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뿐인가. 뭐 하나 만들라치면 아이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놀아달라는 통에 집중력은 흐려지고 조용하다 싶으면 비닐팩을 죄다 뽑고 있거나 어딘가에서 사고를 치는 아이 덕에 요리는 더 산으로 가곤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남편은 요리에 참여하지 않는다. 친구 시할머니와 같은 생각을 하는 문화 속에서 30년을 넘게 자란 남편의 머릿 속엔 ‘요리=여자’가 뿌리깊게 박혀있는 듯하다. 누굴 탓하랴. 화가 치밀다가도 놀아달라고 징징대는 아이를 상대하느라 제대로 싸울 힘조차 없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살림과 육아는 왜 여자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못하겠다. 초등학교 시절 바른생활 교과서에 행복한 가정상을 표현하는 그림은 늘 똑같았다. 엄마는 요리하고 아빠는 신문보고 아이들은 노는 모습.
엄마도 신문보고 싶고, 놀고 싶다. 심지어 나는 일도 하는데..이 억울함은 남자 셰프와 친구 시할머니가 공존하고 있는 이 사회를 탓할 수밖에 없는걸까. 바른생활 교과서는 하루는 엄마가 요리하고, 하루는 아빠가 요리하고 가끔은 아이들도 요리에 즐겁게 참여하는 그림으로 바껴야 마땅하다.
내 딸은 나같은 괴로움을 느끼지 않게 키우리라 다짐한다. 어릴 때부터 요리에 흥미를 느끼게 해서 스스로 요리를 할 수 있게 만들거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역시 스스로 모든 집안일을 할 수 있는 남자를 택하라고 조언할거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할 때도 주말에 뭐해을먹지 고민하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아는 남자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