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눈치 보여 못 틀어…떼어가라 그래”

[폭염 무방비, 경비원들]②
더위 피해 그늘 밑 휴식·경비실 문 열어 환기
에어컨 옆 계량기 설치, 월말마다 전기세 측정
설치는 지자체가…관리비·전기세는 주민 부담
경비원 에어컨 불평에…지나가던 주민 '눈살'
  • 등록 2021-08-09 오전 5:11:01

    수정 2021-08-09 오후 12:17:13

[이데일리 조민정 기자] “‘몇 동은 (전기세) 얼마 나온다’이런 소리 듣기 싫어. 추접스러워서 안 틀어.”

8월 초 숨이 턱 막히는 불볕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수많은 경비원들은 더위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유일한 근무공간인 1~3평 남짓한 경비실에서 선풍기 한 대로 더위를 식히거나 문을 열어 더운 바람이 들어오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에어컨 설치만이 능사는 아니다. 에어컨을 설치한 곳 상당수가 전기요금 문제로 눈치를 보느라 가동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서울 노원구 A아파트 경비실 내 설치된 에어컨 바로 옆에 계량기가 붙어 있다. 해당 계량기는 경비실마다 에어컨 전기세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된다.(사진=조민정 기자)
일주일 만에 계량기 설치…월말마다 금액 계산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B아파트는 지난 3월 주민투표를 통해 각 경비실마다 에어컨을 설치했다. 자치구에서 실시하는 ‘경비실 에어컨 설치 지원사업’에 선정돼 설치비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에어컨 설치 일주일 만에 ‘계량기’를 바로 옆에 달았다. 각 경비실마다 에어컨 전기세가 얼마씩 나오는지 측정하기 위해서다. 월말이 되면 관리사무소에서 점검을 돌면서 계량기 수치를 파악해간다.

경비원들은 에어컨을 켤 때마다 올라가는 계량기 속 숫자를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토로했다. 9년간 B아파트에서 근무한 경비원 지모(73)씨는 가장 더운 한낮에만 몇 시간 트는데도 눈치가 보인다고 고개를 저었다. 지씨는 “솔직히 한 달에 많이 써봤자 4만5000~4만8000원 정도 나오는데, 그럼 세대당 월 300원 정도다. 많이 써봤자 (계량기) 두 자리인데도 (주민) 여론 자체가 전기세를 많이 쓴다고 조성된 상황”이라며 차라리 경비원이 전기요금을 납부하게 해달라고 토로했다.

특별히 계량기가 없어도 주민 눈치가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에어컨이 설치된 C아파트에서 근무하는 임모(72)씨는 “마음껏 틀고 일하라는 주민도 있긴 한데 뒤돌면 뭐라고 말할지 뻔하니까 절제하게 된다”며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눈치 보이는 건 사실”이라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어컨을 켜놓고 경비실에서 휴식 중이던 C아파트 경비원 장모씨 또한 “너무 많이 틀면 뭐라고 하긴 한다”라면서도 “근데 요즘 너무 더우니까 눈치 보여도 안 틀 수가 없어서 조금씩 튼다”고 설명했다.

주민 “아끼라는 뜻”vs경비원 “감시하는 것”

설치비는 지자체에서 지원해주더라도 이후 발생하는 관리비용과 전기요금은 모두 주민들의 몫이다. 설치 주체와 관리 주체가 다르다 보니 에어컨을 사용하는 경비원도, 비용을 부담하는 주민들도 크고 작은 의견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늘색 근무복이 땀에 젖어 짙은 파란색이 된 채로 분리수거 업무를 하던 4년 차 경비원 이모(76)씨는 ‘에어컨’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딴 거 필요 없고 에어컨이나 떼어 가라 그래!”라고 누군가 들으라는 식으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해당 동 주민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조금 아껴 쓰라는 의미에서 그런 거겠지.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냐”고 반박했다.

아파트 주민들이 에어컨 전기요금으로 민원을 넣는 이유는 경비원들이 업무를 보러 나갈 때 에어컨을 끄지 않고 외출해서다. 조금 아껴 쓰라는 의미로 넣은 민원이 경비원에겐 심리적인 위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에어컨을 사용하는데 큰 불만이 없는 다른 아파트 경비원들도 ‘나갈 때만 끄면 된다’는 암묵적인 조건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C아파트 경비실에서 에어컨을 켜고 근무 중이던 박(78)모씨는 “그래도 여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주는 편”이라면서도 “대신 나갈 때 안 끄면 민원이 들어와서 꼭 지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에어컨 사용이 자유로운 편이라는 D아파트 70대 경비원 배모씨도 주민들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공동 휴게공간에서 에어컨을 쓰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토로했다. 경비실에서 사용하면 ‘개인 사용량’이 나오는데 공용공간에서는 여러 명이 사용하니 심적 부담이 덜하다는 뜻이다. 배씨는 “경비원 업무가 잠깐 외출하는 경우도 많은데 잠깐이라도 켜놓고 가면 민원이 들어오니까 그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며 “공용공간이 좀 멀긴 해도 아침 11시 반부터 오후 2시까지는 거의 거기서 쉰다”고 설명했다.

지씨는 지자체가 설치만 해주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대로 사용이 이뤄지는지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장에 나와 관리사무실과 경비원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는 셈이다.

정의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본부 조직차장은 “요즘은 구청 등 지자체에서 설치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아예 에어컨이 없는 것보다 있는데 사용하지 못하는 게 더 고역”이라며 “지자체에서 설치를 해준다고 해도 관리비가 올라간다는 이유로 주민대표들이 설치를 거부하는 아파트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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