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구칼럼] 트럼프와 여의도 정치권의 '도플갱어'

  • 등록 2016-02-05 오전 3:01:01

    수정 2016-02-05 오전 3:01:01

혹시나 했지만 결국 ‘찻잔 속 태풍’으로 막을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선거 후보 얘기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는 미국 대선 레이스 첫 관문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쓴잔을 마셔야 했다. 미국 정가(政家)에서 ‘트럼피즘’(Trumpism)이라는 신조어를 선보이며 미국 사회를 송두리째 바꾸겠다는 정치적 선동을 일삼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의 초라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는 물론 선거에서는 졌지만 전리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막말 시리즈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미국 백인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부각시켜 단단히 한몫을 챙겼다.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사회에서 수십 년내 소수민족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백인들의 불편한 속내를 ‘불법 체류자 1100만명 추방’ , ‘무슬림 미국 입국 전면 금지’라는 엉뚱한 메뉴로 달랬으니 말이다. 백인들에게는 돌아서서 웃을 수 있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인 셈이다.

아이오와 선거는 표면상으로는 트럼피즘의 화려한 데뷔 무대였지만 실제 표심을 가른 것은 궤변주의자 트럼프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대한 집단이성의 표출이었다. 영국의 인지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이 처음 선보인 확증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다른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뜻한다. 다민족 사회인 미국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정치와 경제 문제를 인종과 문화의 충돌로만 여기는 트럼프의 터널 비전(tunnel vision)에 미국내 양심세력이 반기를 든 것이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60년 만에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한국을 향해 트럼프가 ‘안보 무임승차론’을 꺼내며 폄훼했지만 그에게 조선시대 역사적 교훈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세종대왕은 어전회의 때마다 예조판서 허조(許稠)를 참석시켰다. 허조는 회의 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품을 지녀 대신(大臣)들이 기피한 인물이었다. 세종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허조를 회의에 참석시킨 것은 그를 통해 대신들이 빠질 수 있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집단사고는 의사 결정 때 만장일치를 이끌어 내려는 속성 때문에 자칫 비합리적인 결론을 내는 단점이 있다. 특히 결속력이 강한 집단일수록 의견일치에 대한 의지가 강해 다른 이의 의견을 무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럴 경우 자기 신념과 일치하는 의견은 수용하고 다른 의견은 무시하는 확증편향에 빠질 수 있다. 트럼프가 사고의 오류를 이끄는 확증편향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과 다른 이들의 주장을 적극 수용해 논리의 모순을 점검하는 개방적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의 여의도 정객들도 트럼프의 기이한 사고체계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듯하다. 국가경제가 백척간두에 서있지만 우리 정치권에는 남의 나라 얘기다. 이들은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도그마에 함몰돼 당장 시급한 경제활성화 법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암울한 현주소다. ‘경제의 최대의 적은 정치’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지 못한 정책은 결국 유권자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사례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국민들은 ‘국회무용론’까지 불거지고 있는 현실을 냉엄하게 지켜보고 있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분파정치와 정치적 불신을 조장하는 정치권에 오는 4월 총선은 침묵하는 다수의 집합적 의사가 표출하는 준엄한 심판의 장이 될 것이다.

<글로벌마켓부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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