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시계바늘을 21년전 봄으로 돌려보자.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경북 구미공장 운동장에는 불량제품으로 판명 난 무선전화기와 팩시밀리 등 15만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무선전화기는 출시된 지 5개월밖에 안된 애니콜의 첫 제품 ‘SH-770’이었다. 삼성 임직원 20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한 곳에 있던 불도저가 이들 제품을 산산조각 냈고 잘게 부셔진 제품에는 불이 붙었다. 500억원 어치의 제품은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이날 화형식을 집행한 주인공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었다. 이 회장은 무선전화기에 불량품이 있다는 보고를 받자 불량품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제품을 집어삼킨 거대한 화염은 어쩌면 품질 완벽주의를 고집한 이 회장의 분노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회장의 ‘애니콜 화형식’은 회사내 느슨해진 규율을 바로잡고 삼성 스마트폰이 세계 1위 제품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밑걸음이 됐다.
아픈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7 파문으로 21년만에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현존하는 최고의 기술을 갖춘 갤럭시노트7은 배터리 화재사건이 잇따르자 제품 리콜이 아닌 단종(斷種) 이라는 극약처방을 받았다. 삼성으로서는 처리 방식만 다를뿐 ‘제2의 화형식’을 치른 셈이다.
갤럭시노트7 파문은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의 결과물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필립 짐바르도가 1969년에 발표한 이 이론은 사소해 보이는 것을 등한시하면 결국 전체가 무너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삼성은 1등 자리에 안주한 나머지 갤럭시 노트7 제품의 전체 성능을 좌우할 수 있는 미세한 부분을 등한시했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 지역 일대가 더 큰 무질서와 범죄로 이어지는 무법천지가 된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결국 기술 혁신이나 변화도 거창한 것이 아닌 사소한 것에 결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첨단 기술 개발에 따른 시행착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삼성이 이번 배터리 파문으로 제품 브랜드에 타격은 입었지만 기술혁신과 품질개발을 위한 고통의 장정(長程)은 계속돼야 한다. 또한 삼성은 이번 파문을 통해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는 마케팅 전략을 재정립해야 한다.
삼성으로서는 이번 사태가 굴욕이 아닌 실패에서 배우는 경영학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텔을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로 일궈낸 후 올해 초 타계한 앤디 그로브 전(前) 회장이 삼성 갤럭시노트 사태를 지켜봤다면 아마 이런 조언을 하지 않았겠는가. “성공은 자만을 낳고 자만은 실패를 낳는다. 오직 패러노이드(paranoid·편집광:사소한 일을 크게 걱정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3류기업은 위기로 인해 파괴되고 2류기업은 위기를 이겨내며 1류기업은 위기로 발전해온 게 기업의 근대사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트트에서 혁신을 강조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선보인 지 23년이 지났다. 이재용 부회장은 갤럭시노트7 사태를 계기로 휴대전화는 물론 삼성 전 제품에 대한 ‘제품 무결점주의’를 실천하는 ‘제2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해야 한다. 드론(drone:무인항공기), 인공지능(AI), 로봇 등으로 대변되는 제4차산업혁명의 거센 파고(波高)에 맞서 이겨내려면 제품 불량이나 실수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삼성으로서는 그동안 걸어온 패스트 팔로워(새 기술을 빠르게 쫓아가는 기업)전략에서 탈피해 차별화된 기술로 시장을 장악하는 패스트 무버로 자리매김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복합위기 상황을 극복할 이 부회장의 야심찬 기술혁신을 기대해본다.
<글로벌마켓부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