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네팔 왕정붕괴냐… 대규모 유혈사태냐

시위대 “도둑 갸넨드라王 나라 떠나라”
정부, 시민집결 막으려 휴대전화 차단
  • 등록 2006-04-24 오전 7:24:29

    수정 2006-04-24 오전 7:24:29

[조선일보 제공]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민주화 시위대들은 23일 종일 “갸네 초르, 데스 초르”를 목이 쉬도록 외쳤다. ‘도둑 갸넨드라는 나라를 떠나라’는 구호다. 한때 신이었던 네팔 왕은 이제 거리에서 ‘도둑’으로 불린다.

갸넨드라 왕이 21일 행정권을 민간에 넘기겠다고 발표했으나, 가두 시위대와 7개 정당연맹(SPA)에 의해 거부당했다. 하원(下院) 복원, 공산반군과의 대화 등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네팔 변호사협회와 기자협회도 왕의 제안을 거부했다. 시위대의 주장은 이제 단순명료하다. 갸넨드라 왕의 해외 망명과, ‘왕정 타도’가 목표다. 이로 인해 1768년 이후 238년 된 네팔 ‘샤’ 왕조가 종식되느냐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느냐 기로에 서게 됐다.

총파업 18일째인 23일 시위대의 ‘해방구’로 변한 카트만두 순환도로의 한 구간 공가부. 시위대는 페인트를 사다가 이곳 도로 표지판을 ‘공화국 거리’란 뜻의 ‘가나탄트라 촉’이라고 고쳐 썼고, 2차선 아스팔트 길바닥에는 ‘네팔 공화국 만세’라고 노란색 글씨로 대문짝만하게 썼다.

22일에는 사태 시작 뒤 처음으로 수만 명의 시위대가 순환도로의 공가부 지역에서 경찰의 제지를 뚫고 도심으로 진출했다. 마오이스트 반군도 시위에 동참했다. 왕궁 근처에서 군은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했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정부는 또 시위대 동원에 이용되는 휴대전화 서비스를 중단시켰다.

레누 냐우파네(29)씨는 “갸넨드라가 형인 비렌드라 왕을 죽인 배후세력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4월 네팔 왕궁에서는 디펜드라 왕세자가 부왕인 비렌드라를 포함 어머니인 왕비 등 왕가를 집단 학살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술에 취해 만행을 저질렀다고만 발표됐을 뿐이어서 왕에 대한 불신은 이제 그를 살인자로 지목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트리부반 대학 1년생인 툴라 라이씨는 “왕을 신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 세대와, 신교육을 받은 우리 세대는 다르다”고 말했다.

시위대와 정치권은 ‘왕정 이후’ 공화제로 갈 길을 열 ‘제헌 의회’를 요구하고 있다. 제헌 의회를 구성하려면 선거를 치러야 하고, 국토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는 공산반군과의 합의도 필요하다. 반군은 왕정철폐를 요구해 왔다.

갸넨드라 왕은 군에 의지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네팔군은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고 있으며, 동요하는 기미는 없다. 하지만 왕이 유혈 진압을 명령할 경우, 군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경찰의 경우 군과 다르다. 거리에서 시위대의 행동을 통제하면서도 살짝살짝 엄지손가락을 들어 시위대에 성원을 보내는 모습도 눈에 띈다.

왕이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대단히 좁다. 그를 달래주는 유일한 소식은 인도와 미국, 중국이 21일 자신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는 네팔에서 혁명보다는 안정을 바라고 있다. 왕은 22일 자신의 제안이 거부당한 뒤 시위 진압 병력을 수도에 증파하거나, 반대세력에 대한 검거에 나서지도 않고 있다. 이로 인해 갸넨드라 왕의 다음 조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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