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株소설]대차대조표 축소 '카드'로 역전을 꿈꾸는 파월 의장

UBS "연준, 금리 인상 쉽지 않을 경우 대차대조표 축소"
파월 기자회견서 "처음 논의했고 매우 흥미로운 문제"
"장기물 하락, 미국채 수익률 매력적이기 때문"
맞다면, 대차대조표 축소 시 장기물 상승 전망
틀리다면, 하락해 경기 둔화 우려↑
  • 등록 2021-12-20 오전 5:40:00

    수정 2021-12-20 오전 5:40:00

[이데일리 고준혁 기자] 위기는 또 다른 기회란 말이 있습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위기를 맞았고 이를 되돌리려 노력 중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인플레이션을 잡겠다(Pivote On Inflation)는 굳은 결의에도 시장이 파월 의장을 아직 완전히 믿고 있진 않습니다. 0.7%에 육박했던 미국채 2년물 금리는 되레 0.6% 초반대까지 하락하고 있습니다.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잡으면서도, 경기 둔화 우려를 잠재우면서도, 민간시장 개입도를 줄일 수 있는 등의 ‘일석다조’의 카드가 있습니다. 대차대조표 축소, 재투자 중단, 양적긴축(QT·Quantitiative Tightening) 등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이 채권을 덜 사주는 것이라면 QT는 갖고 있는 채권을 파는 개념입니다. 물론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종종 혹을 떼려다가 혹이 붙을 때도 있습니다.
영화 ‘타짜’ 장면.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12월 FOMC서 처음 나온 ‘대차대조표 축소’

지난 13일 나온 한국은행 외자운용원의 ‘국제금융시장 동향 및 주요 이슈’ 보고서에는 해외 주요 투자은행(IB)들의 연준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 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IB들은 과거 연준 정상화 사이클처럼 정책금리를 올린 뒤 QT를 단행한다고 전망했지만, 일부는 좀 다른 의견을 내놨습니다.

뱅크아메리카(BoA)는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저해되고 은행의 예대마진 축소로 대출 유인이 감소하는 점 등을 고려해 대차대조표 축소를 조기에 실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UBS도 “테이퍼링 종료 후 고용·성장 등 대내외 여건 변화로 금리 인상이 쉽지 않을 경우 대차대조표 축소가 유용한 대안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출처=유튜브)
며칠 뒤 진행된 12월 공개연방시장위원회(FOMC)에서 파월은 처음으로 대차대조표 축소를 언급했습니다. 파월 의장 특유의 애매모호한 화법이지만, 어찌 됐든 대차대조표 축소라는 말이 처음 연준 의장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오늘 대차대조표 이슈와 관련해 처음으로 논의했으며 다음 회의 때도, 그다음 회의 때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며 “마지막 주기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봤으며 사람들은 이를 흥미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만 사람들은 현재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언급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장단기 금리 차 축소 원인을 ‘수급’으로 본 파월 의장
일차적으로는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못 잡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장에 ‘인플레를 잡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한다’는 강한 어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도표는 내년 3차례 인상 등 시장이 예상하는 범위에 도달했고, 장기물 기대인플레이션(BEI)는 약 두 달 전부터 꺾여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원자재 가격도 진정되는 모양새고, 내년 1분기부터 공급 병목 현상이 완화된다는 전망도 많습니다. 미국 주택 가격 인상과 통화정책 정상화가 인플레이션에 효과를 내려면 1~2년은 선행해야 한다는 얘기 등이 있지만, 대차대조표 축소까지는 다소 빠른 느낌입니다.

이날 파월 의장의 기자회견에선 이같은 의문을 지워줄 실마리가 있습니다. 한 기자가 “장단기 금리차 축소가 주는 시그널을 우려하는가”란 질문을 했고, 이에 그는 “다른 나라들의 장기금리가 너무 낮아서 미국 장기금리를 아래로 붙잡고 있는 게 원인이다”며 “미국 금리 수익률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국가 간 벌어진 금리 차 자체가 미국채에 대한 강한 수요를 유지시키고 있고 그래서 낮은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장단기 금리 차는 일반적으로 확대될 땐 경기 확장을 축소될 땐 경기 위축을 뜻합니다. 거칠게 보면, 지금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춰 유동성을 확대(단기 금리 하락)하면, 향후 경기가 풀리면서 돈의 수요가 느는 식(장기 금리 상승)으로 설명됩니다. 미국 10년물과 2년물의 금리 차는 금리 인상을 이미 4차례 단행했던 지난 2017년 6월 수준까지 하락(김상훈 하이투자증권 연구원 보고서 참고)했습니다. 당연히 경기 위축에 대한 우려가 나와야 정상입니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연준은 12월 FOMC에서 테이퍼링 속도를 높여 6월에서 3월로 당겨 종료를 결정, 점도표에선 2022년 3차례 금리 인상을 전망하는 등 긴축이 빨라지고 있지만, FOMC 당일에도 10년물 금리는 1bp 상승했다”며 “연준이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거두어 들이는 점은 경기회복을 지연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으로, 오미크론 변이로 경기 불확실성까지 있는 상황까지 고려하면 10년물 금리가 큰 폭 상승하긴 어렵다고 판단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파월 의장은 이 경기 둔화 얘기를 안 한 것입니다. 장기물 금리 하락의 원인을 미국 국채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며 수급이라고 지목합니다. 기관에서 이미 제기된 해석이기도 합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지난 13일 ‘금리 수수께끼의 조건’이라는 보고서에서 “그린스펀의 수수께끼는 2000년대 중반 연준 의장이었던 그린스펀이 정책금리를 인상했음에도 시장금리는 제한적인 상승에 그치거나 하락했던 상황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다며 곤혹스럽단 견해를 밝힌 걸 말한다”며 “당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미국과의 교역을 통해 축적된 외환보유액을 바탕으로 다시 미국 국채를 대거 매입함에 따라 시장금리가 기준금리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던 게 주요 원인이었다”고 전합니다. 이어 “현재 미국 채권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도 그린스펀 수수께끼 같은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며 “특히나 코로나19 이후 미국 경제가 상품 위주의 소비 확대를 지속하고 있는 만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 과정에서 수지 불균형이 채권시장 수급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잘 되면 장기물 상승, 안 되면 장기물 하락

파월 의장은 장기금리가 하락하는 상황을 경기 둔화가 아닌 수급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판단을 대차대조표 축소와 맞물려 생각해 보면, ‘오히려 좋은’ 그림이 그려집니다. 정책금리 조정보다 장기물에 영향이 큰 연준의 자산 규모 관리는, 축소하기 시작하면 금리 상승 요인이 됩니다. 미국 장기채의 큰 손인 연준이 빠지면 수요는 줄어 채권 가격이 하락하면서 금리가 오른다는 얘깁니다. 어쨌든 테이퍼링도 수요가 계속 느는 것이고, 코로나19 이후 연준 자산 규모 증가율은 전무후무합니다.

한 자산운용사 매니저는 “가장 매파로 분류되지만 제임스 블라드 세인트루이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코로나19 이후 연준의 자산 매입 규모가 너무 과했다고 지적하고 있다”며 “수요에 타격이 적은 특수한 위기인데도 지나치게 금융 시스템 마비를 걱정하면서 채권을 많이 샀기 때문에 그 이후로 장기물이 바닥에 붙어 있고, 특히 실질금리가 너무 낮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개인적으로는 현재 연준이 쌓아둔 거대한 채권들만으로도 장기금리를 하락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습니다.
대차대조표 축소가 장기금리를 상승시키게 되는 것은 여러 부수효과가 있습니다. 인플레 잡기로 피봇을 옮긴 연준을, 긴가민가하게 바라보는 시장을 꽉 붙들어 둘 수 있습니다. 장기물은 집값에 연동됩니다. 미국 집값 인상은 내년 초 공급 병목 현상이 풀리더라도, 중장기적으로 인플레에 부담을 주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장기물이 올라 집값이 안정화되면, 이 또한 인플레 우려를 줄입니다. 이밖에 장단기 금리 차 축소가 경기 둔화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을 교정할 수도 있습니다. ‘경기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사실 수급 때문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더 확대되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는 연준이 민간시장 개입도를 낮추는 긴축 과정을 수월하고 부드럽게 수행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 좋은 대차대조표 축소 꼭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장기물 하락의 요인 중 경기 둔화가 껴 있는 거라면, 오히려 대차대조표 축소는 장기물을 더 둔화시켜 장단기 금리 차를 더 붙게 할 수 있습니다. 심해지면 장기물이 단기물보다 낮은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급격한 경기 둔화를 우려한 자본시장에선 극단적인 위험 회피(Risk off)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매니저는 “장기금리가 낮은 원인을 뭐로 규명할 거냔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하다”라며 “대차대조표 축소 정책을 펼지 말지가 달린 것으로, 액션이 나왔을 때 시장 잘못 알아듣는다면 장기물은 더 눌릴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이에 12월 FOMC에서 대차대조표 축소 운을 띄운 연준은 앞으로도 서서히 간을 볼 것 같다. 당장은 12월 FOMC 의사록 공개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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