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처음부터 사회 각 부문의 꼭대기로 올라갈 수는 없다. 밑바닥부터 경험과 실력을 쌓고 사다리 한 칸씩 차근차근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작은 것에서 시작해 큰 것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점진적으로 교육받고 경험하고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건강한 사회는 의지만 있다면 가급적 많은 이들이 얼마든지 경쟁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경쟁은 치열한데 사다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도록 선택된 사람의 수가 너무 적으면 양극화는 심화한다. 높은 자리를 선점한 사람들이 손쉽게 사다리 시스템을 무력화한다면 공정의 가치가 위협받고 사회 구성원 간 불신이 팽배해질 것이다. 일반이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고 튼튼한 사다리 시스템이 자리 잡은 사회를 우리는 선진국이라 부른다.
일자리, 취업 시장에도 사다리가 있다. 경기가 아무리 좋아도 모두가 선망하는 많은 급여, 좋은 복지를 제공하는 좋은 일자리는 늘 구직자 수보다 적다. 모든 일자리를 신의 직장으로 만드는 일은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의 최선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갈 능력을 갖출 수 있게 기회를 가급적 평등하게 제공하는 일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다양한 층위의 일자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잘 갖춰져 있지 않다. 가정 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다 졸업이 늦어지면 대기업 취업이 물 건너갔다는 말이 회자되고, 첫 직장이 중소기업이면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인식도 있다. 일부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일자리 사다리를 밟고 올라서는 사례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취업 시장에서 뛰는 플레이어들의 합의된 인식이다. 누구나 원한다면 일할 수 있고, 기회가 오면 더 좋은 일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사다리가 확충되어야 청년들의 좌절과 눈물을 닦아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용환경의 유연성, 즉 취업, 퇴직, 전직이 자유롭지 않은 탓에 오히려 취업 기회는 박탈되고 기업 생산성과 경쟁력이 저하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신입사원을 대거 육성해 사회에 유용한 인력으로 공급하는 대기업 공채와 직원 육성제도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학교와 기업, 학문과 실용, 질과 속도라는 격차와 간극을 줄이는 역할을 담당 해온 것은 물론, 전문가 양성과 일자리 이동을 위한 사회적 교육시스템에 일정부분 기여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공채제도를 없앤다면 사회적 역할과 공정성의 문제가 오히려 더 후퇴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합리적 의사결정인지 대학과 국가 인재 양성시스템 간의 바람직한 방향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오히려 부모찬스를 쓸 수 없는 계층의 공정한 채용기회를 없애는 사다리 걷어차기 일 수도 있다.
과연 일자리를 만드는데 앞장서는 정치인은 누구인가. 청년들에게 기본소득 1억씩 줄 수 있는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면. 사다리를 걷어차는 결과를 누가 책임 질 것인가. 우리 아이들을 빌어먹게 할 것인가, 벌어먹게 할 것인가. 고기를 잡아 줄 것인가 잡는 방법을 알려줄 것인가.
결국 사다리론의 중요한 부분은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 공평한 분배가 아닌 기여 한 만큼의 보상을 바라는 추세에 적합한 사회시스템에 있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은 직장선택의 사다리 통로를 더 넓히는 데 사회적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전통적 의미의 정규직 일자리가 급속도로 ‘긱’ 일자리로 대체되고, 일자리에 국경과 시간의 장벽이 없어지는 시대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우리 20대, 30대들이 멸종당하지 않고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층위의 일자리들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닐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해보자.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좋은 사다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의지에 따라 당장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많은 기회, 더 공정한 기회가 모두에게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지금 이 시대, 이사회의 역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