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 아름다워서 더 슬픈 마을, 제주의 보석 '가시리'

  • 등록 2013-01-15 오전 7:00:34

    수정 2013-01-15 오전 7:00:34

[서귀포=이데일리 이승형 선임기자] 한라산 동남쪽 능선을 따라 저 멀리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마을. 황량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불쑥 불쑥 오름들이 흡사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곳.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넋들의 땅이자, 봄의 유채와 가을의 억새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고장. 그래서 더 서글픈 공간. 여기는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다.
갑마장길을 따라 큰사슴이오름으로 가는 길목. 대지위에는 억새와 검은 돌들과 앙상한 나무들이 서 있다. 길 한켠에는 풍력발전소 풍차가 우뚝 서 있다. 이 길은 600년전부터 제주의 말들이 다니던 흔치 않은 길이다. 이승형 선임기자


제주의 슬픈 보석, 가시리

해발 90m에서 570m. 가시리는 한라산 고산지대와 서귀포 해안지대를 연결시켜주는 산간 마을이다. 문화지도 책자에서는 이 곳 가시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문대할망(제주도를 창조한 거대한 체구의 여신)이 우도와 가파도에 양 발을 걸쳐 빨래하다 지칠 즈음, 두 손을 쉬었을 법한 자리에 광활한 대평원을 품고 있는 ‘가시리’라는 마을이 있다. 평원은 할망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꾹 누른 듯 그 흔적을 닮았고, 마을 중심을 흐르는 가시천, 안좌천은 할망의 손금처럼 구불대며 바다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비유는 적절하다. 산과 바다 중간에 이토록 넓은 대지가 숨은 듯 자리잡고 있는 것이 놀랍다. 날씨 좋은 날이면 가시리 어느 곳에서든 지평선과 수평선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 활짝 트인 분지에는 설오름,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등 모두 13개의 오름들이 있다. 120만년 전 바다 밑에서 솟아오른 한라산이 제 열기를 견디지 못해 사방으로 불꽃을 튕겨 만들어 낸 흔적들이다. 여기 오름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오르면 사방 천지가 대평원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을 본다. 세상에 그 어떤 풍경도 부럽지 않다.
큰사슴이오름에서 내려다 본 전경. 드넓은 대지는 조선시대 최고의 말을 기르던 갑마장이다. 가시리신문화공간조성추진위원회 제공


그러나 이 땅에는 한(恨)이 서려 있다. 1948년 ‘잔인한 4월’에 벌어진 제주 4·3사건은 가시리를 야만의 시대 한복판으로 몰아넣었다. 좌익이라는 누명을 쓴 채 5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이 무참히 살해됐다. 아이들과 부녀자들도 있었다. 당시 마을 인구의 절반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래서 가시리에는 ‘새가름’이란 이름의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 있다. 100여 명이 거주했던 마을이 4·3사건때문에 잿더미로 변한 뒤 아예 사라졌다. 지금은 표지석만이 남아 있다.

가시리 본동 게스트하우스 ‘타시델레’ 마당 옆에는 4개의 묘가 있다. 큰 묘는 어머니, 중간 묘는 18살 아들, 작은 묘 2개는 갓난애기들의 것이다. 4·3 사건 때 희생된 한 가족의 무덤들이다. 애기무덤을 보다가 하늘을 우러러 물어본다. 왜? 도대체 왜?

갑마장길과 조랑말박물관

474m 높이의 큰사슴이오름을 오르는 길. 빛바랜 억새들이 겨울 바람에 흔들린다. 그 옆으로 풍력발전소의 거대한 풍차들이 소리없이 돌고 있다. 사위는 너무나도 고요해서 4·3 영혼들의 한맺힌 절규는 허공을 찢는다.

억새와 풍차,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자 푸른 해원을 향해 영원히 흔들었던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시인 유치환의 깃발이다.

오름 정상에서 내려다 본 대지에는 조랑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뛰놀고 있다. 가시리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태고로부터 말들이 뛰놀던 곳이다.
가시리 13개 오름 중 하나인 따라비오름. 따라비란 ‘땅할아버지’라는 뜻이다. 가을철 따라비 억새는 제주 오름 368개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승형 선임기자


조선시대엔 가장 최고의 등급을 가진 말을 ‘갑마(甲馬)’라 불렀다. 가시리에는 몰테우리(말떼를 돌보는 목동)들이 말을 키워 임금에게 진상하던 갑마장이 있었다. 지금은 200만평의 마을공동목장으로 진화했다.

이 말들이 다니던 길이 바로 ‘갑마장길’이다. 거대한 초원을 가로지르는 20.2km 길이의 길. 시속 3km의 속도로 걸어서 7시간. 갑마장길 기행은 제주의 풍광과 함께 잣성(목장 경계를 표시한 돌담), 목감막터, 목감집, 목도(牧道)등 제주의 600년 목축문화를 엿볼 수 있는 여정이다.

인근 해비치호텔에서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프로그램 가운데 갑마장길 기행이 있을 정도로 최근 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고라마, 총마, 가라마, 월라마, 부노마 등 제주마도 여러 종류가 있지요. 17개의 DNA 테스트를 통과해야 제주마로 인정받습니다.”

조랑말박물관의 정슬기 학예사는 말한다. 가시리 한복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하나인 녹산로 한 켠에는 조랑말박물관이 있다.
조랑말박물관 2층 내부. 제주마의 역사를 한 눈에 들여다 보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말과 관련된 작가 20여명의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조랑말박물관 제공


지난해 9월 문을 연 이 박물관은 제주마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말과 관련된 유물 및 문화예술작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조랑말 타기나 먹이 주기 체험도 가능하다. 몽고식 천막 방식으로 넉넉하게 지어진 게스트하우스와 캠핑장도 갖추고 있다.

자연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곳

몽생이(망아지) 쿠키, 당근풀빵, 한라산 용암빵, 말똥과자, 가시리카노, 보리개역(미숫가루)…. 조랑말박물관 2층 마음(馬音) 카페 메뉴판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여기서는 공정무역 커피와 지역에서 생산된 유기농 재료들로 만든 먹거리들만 판매한다. 최근에는 진짜 전복이 들어간 풀빵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지하 용암덩어리가 지상으로 솟아올라 만들어진 행기머체. 동양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크립토돔이다. 가시리신문화공간조성추진위원회 제공


가시리에는 이렇게 오름이나 갑마장길 말고도 발품을 팔아 들러봐도 후회하지 않을 명소들이 많다. 우선 제주 탄생의 흔적이라 일컫는 ‘행기머체’다. 머체는 돌무더기를 말하는 제주 방언으로 머체 위에 행기물(놋그릇에 담긴 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용암덩어리는 동양에서 가장 큰 크립토돔(cryptoddome)‘이다.

또 40여년 동안 제주의 풍광을 사진기에 담아 온 서재철 작가의 ‘자연사랑 갤러리’, 제주 흙으로 빚은 도자기들을 볼 수 있는 ‘흙담 갤러리’, 천연 염색을 체험하는 ‘참, 곱다’ 등도 가시리와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지금종 조랑말박물관장의 말이다.

“여기가 제주의 다른 곳처럼 골프장으로 변했다면 어땠을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물론 그런 시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수 년 간의 소송을 통해 막았어요. 어떻습니까. 정말 보석같은 곳 아닙니까.”

길라잡이

▲ 숙박=가시리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해비치호텔과 리조트가 있다. 성인 2명 기준으로 빌리지뷰 객실 1박, 아침 뷔페 식사, 사우나, 해비치 익스플로러 프로그램 체험 등이 포함된 가격이 주중 24만원, 주말 32만원이다.

익스플로러 프로그램은 ‘제주의 알프스’라 불리는 영주산 등반과 바비큐 파티, 사회 유명 인사를 초청해 이야기를 들으며 와인과 칵테일을 즐기는 ‘살롱드해비치’, 어린이들을 위한 눈높이 강좌인 ‘키즈아뜰리에’ 등으로 준비돼 있다.(064-780-8000)
해비치 호텔 객실 내부. 해비치호텔 제공


이밖에도 타시텔레 게스트하우스(010-4690-1464), 블라제리조트(064-787-2588), 명성쉼터방갈로(064-787-1121) 등이 있다.

▲ 교통=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시리 가는 버스가 오전 6시 28분부터 하루 4차례 있다. 소요시간은 1시간. 또 서귀포에서 가시리를 거쳐 표선면 읍내로 가는 시외버스도 오전 6시 53분부터 1시간1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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