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서대웅 기자]
배우자와 노후를 보내고 있는 A씨(70)는 본인이 사망하면 배우자에게 자산을 모두 상속할 계획이다. 하지만 배우자의 자산관리 능력이 부족해 고민이던 A씨는 한 시중은행으로부터 ‘유언대용신탁’ 가입을 권유받았다. 본인 사망 후 은행이 자산을 관리하다가 배우자까지 사망하면 남은 자산을 자녀에게 상속해주는 상품이다. 가입을 검토하던 A씨는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자산의 20%이던 보험은 수탁이 어려워서다. 본인 사망 후 수억원에 이르는 사망보험금을 배우자가 잘 관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깊어지고 있다.
| (그래픽= 김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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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신탁시장 규모는 1200조원대까지 커졌다. 하지만 초고령화 시대에 새로운 ‘사회적 안전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신탁제도를 낡은 규제가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신탁법상 재산적 가치를 지닌 자산은 수탁이 가능해 보험을 신탁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자본시장법이 수탁 가능한 자산 종류를 7종(금전, 증권, 금전채권, 동산, 부동산, 부동산관련권리, 무체재산권)으로 제한하고 있다. 자산종류는 1961년 최초 법 제정 이후 2005년 무체재산권 하나만 포함된 것 외에는 변화가 없다. A씨 경우 보험금청구권의 수탁이 막힌 이유다.
은행권 관계자는 “현재는 적지 않은 보험금이 수익자에게 한 번에 지급될 수밖에 없다”며 “보험금 청구권도 수탁이 가능해지면 신탁회사가 자산 관리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층이나 미성년 자녀 등에게 분할 지급하는 방식 등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은행권에서도 ‘보험금청구권신탁’ 개발 움직임이 있었지만 자본시장법상 불가능해 개발을 포기했다”고 전했다.
중소기업의 가업승계도 신탁제도와 맞물렸다. 현행 상속세법상 중소기업 사장이 일정 요건을 채워 회사를 승계하면 최대 500억원을 공제해주는 가업상속공제를 받을 수 있다. 이때 피상속인을 포함한 최대주주는 최소 50%의 지분(상장법인은 30%)을 10년 넘게 보유해야 한다. 하지만 주식을 수탁하면 주식 소유권이 신탁회사로 넘어가기 때문에 가업상속공제를 받을 수 있는지가 불명확하다. 신탁 기간을 주식 보유 기간으로 봐야 하는지 기준이 없어서다. 주식을 안전하게 맡기려는 수요를 제도가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은행 100년리빙트러스트센터장을 지낸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고문은 “NFT(대체불가토큰) 등 자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재산이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라며 “현재의 ‘열거주의’식 제도에서는 신탁시장이 발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탁이 사회적 안전판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