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인정전은 창덕궁의 가장 으뜸 건물입니다. 순종이 1907년 창덕궁에 들어오면서 대대적인 수리를 해 샹들리에가 설치돼 있죠. 이 샹들리에는 지금 불이 들어올까요?”
| ‘창덕궁 달빛기행’ 중 창덕궁 인정전 내부. 1907년 설치된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사진=장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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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서 ‘창덕궁 달빛기행’을 진행하던 최연섬 해설사가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예상 밖 질문에 참가자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인정전 내부를 둘러봤다. 천장엔 진짜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답은 “아니오”였다. 최 해설사는 “순종이 샹들리에를 설치했을 당시 전기는 110볼트였지만 지금은 220볼트이기 때문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웃으며 “지금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오래된 건물로 여겨졌던 궁궐이 흥미로운 해설과 함께 역사가 살아숨쉬는 공간으로 새로 다가왔다.
저녁에 만나는 창덕궁, 한낮과는 또 다른 정취 가득
| ‘창덕궁 달빛기행’ 중 창덕궁 인정전 전경. (사진=장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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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달빛기행’은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이 2010년 처음 선보인 고궁 체험 프로그램이다.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경희궁·덕수궁·창경궁·창덕궁)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창덕궁에서 은은한 달빛을 맞으며 청사초롱을 들고 궁궐 안을 거니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정식 행사 전날 리허설로 진행한 11일 프로그램은 때아닌 폭염, 그리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로 아쉽게 달빛과 함께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조명만 드리운 창덕궁에서 한낮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최 해설사에 따르면 궁궐은 크게 세 가지 공간으로 구성된다. 왕이 나랏일을 돌보는 ‘정치’의 공간, 왕과 그 가족들이 함께 거처하는 ‘생활’의 공간, 그리고 ‘휴식’의 공간이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이러한 궁궐의 세 공간을 모두 관람할 수 있도록 동선이 구성돼 있다.
창덕궁 입구인 돈화문에서 프로그램은 시작한다. 왕의 공간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금천교를 건너 ‘정치’의 공간인 인정전과 희정당, ‘생활’의 공간인 낙선재와 상량정, 그리고 휴식의 공간인 창덕궁 후원(부용지·부용정, 불로문·애련정, 연경당)으로 이어지는 약 100분가량 소요되는 코스다.
상량정·만월문 등 일반 관람 제한된 곳도 방문 | ‘창덕궁 달빛기행’ 중 창덕궁 희정당 입구. (사진=장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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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왕이 머물렀던 궁궐이다. 1405년(태종 5년) 법궁(군주가 거처하는 제1궁궐)인 경복궁의 이궁(왕이 거동할 때 머무르던 별궁)으로 창건됐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1601년(광해군 2년) 재건됐고, 이후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 년 동안 왕들이 사용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1907년 이곳으로 거처를 다시 옮겼고, 이후 조선 왕실 후손이 머무르며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가 1989년 눈을 감은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건물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희정당도 그 중 하나다. 희정당은 왕의 비공식적인 집무실. 1496년(연산 2년)에 ‘화평하고 느긋하여 잘 다스려지는 즐거운 정치’라는 의미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재건한 것이다. 최 해설사는 “일제강점기에 건물을 복원해서 건물이 다소 답답하게 변형됐다”고 설명했다. 입구가 서양식 건물처럼 현관 형태인 것도 눈길을 끈다. 당시 순조가 캐딜락을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 ‘창덕궁 달빛기행’ 중 창덕궁 상량정 전경. 대금 연주자가 대금을 연주하고 있다. 이곳은 평소 일반 관람객의 입장이 제한되는 장소다. (사진=장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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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달빛기행’ 중 창덕궁 상량정 옆에 있는 숨겨진 포토 스팟 만월문. 이곳 또한 평소 일반 관람이 제한된 곳이다. (사진=장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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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달빛기행’의 또 다른 재미는 평소 일반 관람이 제한된 장소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1847년(헌종 13년)에 세워졌으며 이방자 여사가 생을 마감했던 낙선재 후원에 우뚝 서 있는 육각형 누각 상량정이 대표적이다. 상량정은 ‘시원한 곳에 오르다’라는 뜻. 이곳에선 대금 연주와 함께 서울 도심 야경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창덕궁의 숨겨진 ‘포토 스팟’ 만월문도 지나갈 수 있다.
자연 그대로 간직한 후원, 이몽룡이 과거 급제한 곳 | ‘창덕궁 달빛기행’ 중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사진=장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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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묘미는 무엇보다 후원이다. ‘창덕궁 달빛기행’에서 만나는 후원은 여느 때보다 신비롭다. 청사초롱이 밝힌 은은한 불빛을 따라 걷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이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이끄는 듯 하다. 눈앞에 연못 부용지가 펼쳐지면 이곳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라는 사실마저 잊게 한다.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 왕과 왕비가 부용지를 거닐고 있고, 바로 옆 영화당에서는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다. 최 해설사는 “창덕궁 후원은 서양 정원과 달리 최소한의 인공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자연에 동화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 조상의 가치가 반영된 장소다.
창덕궁 후원은 ‘휴식’의 공간이다. 이때 휴식은 단지 ‘쉼’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 해설사에 따르면 조선의 왕들은 창덕궁 후원에서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기도 했고, ‘춘당대시’라고도 불렸던 일종의 특채 과거 시험(별시)을 치르기도 했으며, 왕실의 잔치도 열었다. 특히 영화당 앞 넓은 마당인 ‘춘당대’에서 별시가 여러 차례 치러졌다. 최 해설사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 급제한 곳도 바로 이 춘당대에서 치러진 ‘춘당대시’였다”고 귀띔했다.
| ‘창덕궁 달빛기행’ 중 창덕궁 후원 연경당에서 관람하는 공연. 효명세자가 창작한 박접무를 무용수들이 추고 있다. (사진=장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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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달빛기행’의 대미는 후원 연경당에서 즐기는 공연이다. 연경당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효심이 담긴 공간으로 궁궐 내에 사대부 집과 유사한 형태로 지어진 주택이다. 고종과 순종대에 이르러 연희를 베푸는 공간으로 이용됐다. 이날 공연에선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위해 창작한 박접무를 비롯해 생황과 단소로 연주하는 ‘천년만세’, 여창가곡 평롱 ‘북두칠성’, 그리고 공을 던지며 노는 춤인 보상무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올해 하반기 ‘창경궁 달빛기행’은 오는 11월 10일까지 진행한다. 매회 높은 인기에 올해 하반기부터는 추첨제 방식으로 관람을 진행하고 있으며 아쉽게도 모든 회차가 매진된 상태다. 내년에도 상반기와 하반기 두 번에 걸쳐 ‘창경궁 달빛기행’을 진행할 예정이다.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은 ‘창덕궁 달빛기행’ 외에도 ‘경복궁 별빛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엔 외국인 특화 프로그램인 ‘창덕궁 별밤연희’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야간 공연을 새로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