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 이웃의 현장을 곱씹다

‘이웃’ 김훈이 써내려간 ‘우리’ 이야기
두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펴내
공시생·군인·간첩 몰린 어부…
삶에 밀착했지만, 글은 삶 감당 못하더라
김훈|264쪽|문학동네
  • 등록 2022-06-08 오전 5:00:00

    수정 2022-06-10 오전 8:28:44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소설가 김훈(74)의 문체는 건조한 단문 위주의 문장과 조사의 미학으로 유명하다. 인물의 감정과 행동, 시·공간 배경 설명 등을 수식 없이 그려낸다. ‘이’와 ‘은’을 두고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던 그의 대표작 ‘칼의 노래’(2001년) 첫 문장인 ‘버려진 섬에도 꽃이 피었다’는 일문(逸聞) 탄생 일화는 지금까지도 국문학도들에게 교과서처럼 읽힌다.

작가 김훈이 최근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문학동네)로 돌아왔다. 2006년 첫 소설집 ‘강산무진’ 이후 16년만이자,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2020년) 뒤로는 2년만의 신작이다. 2013년부터 9년간 문학동네 계간지에 발표한 6개 작품과 1개의 미발표작(‘48GOP’)을 묶었다.

그는 이번 책을 펴내면서 이례적으로 소설집 말미에 ‘작가의 말’을 길게 썼다. 작가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보통 짧게는 한 문장, 길게는 3~4쪽 분량인 작가의 말을 13쪽이나 할애해 썼다. 언젠가 ‘주술 관계만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고백했던 그다. 작가 스스로도 ‘군말’이라 이름 붙인 후기에서 그는 “소설책 뒷자리에 이런 글을 써붙이는 일은 객쩍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노라고 밝힌다.

16년만에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문학동네)를 펴낸 소설가 김훈. 작가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고 했다(사진=문학동네 제공).
2006년 ‘강산무진’을 펴낸 작가는 평단으로부터 호평 받았지만 이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당시 “‘우리’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도 쓰지 못하고 ‘나’의 이야기에만 머물고 있다”고 만족하지 못했다. 이번 신작은 이전의 반성이다. 우리네 이웃들을 소묘하고 ‘지금, 여기’를 이야기한다. 김 작가도 “이웃에 속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이웃의 삶에 밀착해서 썼다”고 했다.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에서는 이러한 김 작가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죽음을 앞두고 호스피스 수녀원에 모여 살게 된 늙은 수녀들과 그들을 편안한 임종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하는 젊은 신부의 나날을 그린다. 2012년 10월23일 작고한 천주교 사제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생애를 생각하며 쓴 글이라고 했다.

작가는 “죽음 저편의 신생에 대해서는 쓰지 못했고 죽음의 문턱 앞에 모여서 서로 기대면서 두려워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겨우 썼다. 가엾은 존재들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힘을 생각”하며 담담하게 써내려갔다고 말했다.

노량진 9급 학원 동네의 젊은이들을 관찰하며 썼다는 ‘영자’에서는 청춘의 고뇌를 함께 고민한다. 그는 “제도가 사람을 가두고 조롱하는 모습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며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기 착취로 바꿔어버리는 거대한 힘이 작동되고 있었다”고 적었다. ‘손’에선 홀로 어렵게 키운 아들이 특수강간·특수감금·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 ‘특’이 세 개 겹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을 겪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소설가 김훈의 두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책 표지(사진=문학동네 제공).
‘명태와 고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도화된 국가폭력에 의해 덧없이 희생된 이웃의 아픔을 들여다본다. ‘명태와 고래’ 속 주인공은 남북의 국가 폭력으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상처 입은 존재다. 자의로 ‘군사분계선’을 넘지 않았지만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3년을 복역한다.

김훈은 “이 보고서를 구해 읽으면서 공포와 절망에 치를 떨었다. 읽은 후에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쓴 글”이라면서 “나의 시대에 폭력은 일상화되고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 제도화된 폭력은 그 야만 행위를 자행하는 자와 피해자와 방관자들의 인간성을 심대하게 파괴했고 그 시대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고 했다.

‘48GOP’에서는 오십 년 전 전쟁 때 동부전선 산악 고지에서 전사한 할아버지를 둔 주인공이 여전히 북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밤을 새우는 모습과 전사자의 유해마저 편을 가르느라 수습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념 갈등을 그려 낸다.

일흔을 앞둔 이춘갑(‘저녁 내기 장기’)과 일흔을 넘긴 ‘나’(‘대장 내시경 검사’)가 등장하는 단편에선 연약한 존재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서 홀로 서 있는 이들에게 응원과 연민의 메시지를 건넨다. 그러면서 그는 “저마다의 고통을 제가끔 갈무리하고 모르는 사람끼리 마주앉아서 장기를 두는 노년은 쓸쓸하다. 삶을 해체하는 작용이 삶 속에 내재하는 모습을 나는 거기서 보았다”고 후기에 썼다.

책에는 “대상에 바싹 들러붙어서”, “형용사를 쓰지 않으려”, “감정을 글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애쓴 문장들로 빼곡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짓밟힌 사람이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면서 “글은 삶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김훈의 글이 지닌 날카롭고도 묵직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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