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질병?]③‘인터넷 중독’부터 ‘질병코드’까지…게임업계 수난사

게임 중독에 관한 학술적 연구와 논란 타임라인
  • 등록 2019-05-13 오전 5:04:00

    수정 2019-05-13 오전 5:04:00

[이데일리 노재웅 기자] 작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게임업계는 게임 중독의 질병코드 등재 논란으로 홍역을 앓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을 밀어붙이면서부터다.

인터넷 중독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는 증상인 게임 중독은 질병코드 등재 이후 국가별 정책에 따라 정식 질환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커진 상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보건복지부가 WHO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게임 중독의 질병코드화를 놓고 사회적 합의를 찾기까지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논란과 대립이 거셀 전망이다.

과거 인터넷 중독이라는 말이 화제가 된 이후 ‘게임의 질병화’가 이뤄지기까지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게임 중독에 관한 그동안의 학술적 연구와 논란을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1996년, ‘영의 척도’에 등장한 인터넷 중독

게임의 질병화를 논하기 앞서 먼저 ‘인터넷 중독’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터넷 중독은 1996년 미국 피츠버그대학의 킴벌리 영 박사가 인터넷 채팅에 빠진 주부의 사례를 토대로 미국 정신의학회에 보고하면서 처음 언급됐다.

알콜 중독 진단 기준에 인터넷을 대입한 방식인 해당 논문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IAT(Internet Addiction Test·인터넷 중독 테스트), 이른바 ‘영의 척도’는 이후 게임 중독을 다루는 많은 연구에서도 지표로 쓰였다.

하지만 수많은 인터넷 중독 연구에도 학계는 정확한 증상 정의를 내리지 못했고, 인터넷 중독은 결국 정신과 진단체계 내의 정식 장애로 인정받지 못했다.

2013년, 美APA DSM-5에 ‘인터넷게임 장애’ 등장

인터넷 중독의 연장선상에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전자마약’이나 ‘게임중독’이라는 단어가 간헐적으로 언론을 통해 이슈가 됐지만, 학술적 용어로 등장한건 미국 정신의학협회(APA)가 2013년 발표한 DSM-5(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 제5차 개정안)에 ‘인터넷게임 장애(Internet Gaming Disorder)’가 나타나면서 부터다.

APA는 당시 인터넷게임에 대한 집착과 제지될 경우 나타나는 금단현상 등 9개 항목 중 5개 이상의 증상을 보이는 경우 인터넷게임 장애로 지칭한다고 정의했다. 그러나 APA는 인터넷게임 장애를 ‘추가 연구가 필요한 범주’로 분류했고, 정식 질병으로 인정받기에는 아직 과학적 연구나 근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질병코드 부여 역시 보류 의견을 제시했다.

2013년, 게임을 ‘4대 중독물질’로 규정한 법안 발의

같은 해 우리나라에선 손인춘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정부가 인터넷게임 중독 예방을 위해 3년마다 예방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인터넷게임 중독유발지수를 측정해 이를 만족하지 못한 게임은 제작과 배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손인춘법’을 발의했다.

또 대한중독정신의학회 출신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이 게임을 알코올, 도박, 마약과 함께 4대 중독물질로 규정한 ‘신의진법’과 게임을 비롯한 콘텐츠산업의 매출액 5%를 징수하겠다는 박성호 의원의 법안도 발의됐다. 이 법안들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때부터 사실상 질병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2017년 12월, WHO “게임 중독=질병” 예고

WHO가 2018년부터 ICD-11(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에 게임 중독 및 장애를 정신건강질환에 등재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2017년 12월 영국의 과학지 뉴 사이언티스트에 의해 처음으로 보도됐다. 28년 만에 개정된 ICD-11 초안은 즉각 논란이 됐다. 게임을 정식 질환으로 인정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WHO의 ICD-11 개정안 초안은 게임이용장애에 물질 중독과 유사한 기준을 적용했지만, 중독의 핵심 증상인 ‘금단 현상’과 ‘내성’을 진단 기준에서 제외하면서 질병으로 진단하기에 불리한 기준을 제거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2018년 1월, 美게임산업협회 공식성명서 발표

미국의 게임산업협회(ESA)는 2018년 1월 공식 성명서를 내고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할 것이라는 WHO의 계획을 정면 반박했다. ESA는 공식 성명서에서 40년 이상 동안 전 세계 2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비디오 게임을 즐겨왔고, 그동안 진행된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비디오게임이 중독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게임 중독에 정신 질환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우울증이나 사회 불안 장애처럼 정말로 치료가 필요하고 의료계의 관심이 필요한 정신 건강 문제를 가볍게 보이도록 만든다고도 우려했다.

2018년 2월, 한국게임산업협회도 WHO 반대 동참

한국게임산업협회도 ESA와 마찬가지로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 등재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공식 성명서를 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한국어뮤즈먼트산업협회, 한국게임개발자협회, 한국모바일게임협회, 문화연대, 게임개발자연대, 한국인터넷PC문화협회가 본 성명서에 공동 참여했다. 협회는 의학계에서도 매듭짓지 못한 문제를 질병으로 분류하기 위해선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년 3월, 세계 저명인사들의 반대 물결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존스홉킨스대, 호주 시드니대 등 정신건강·사회과학 분야 연구자 36명도 임상심리학 분야 학술지인 ‘행동 중독 저널’에 논문을 투고해 WHO 방침을 비판했다.

이들은 논문을 통해 ‘명확한 과학적 기준이 없고, 기존 근거들이 빈약한 점’, ‘해당 진단을 지지하는 연구진도 게임 장애를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점’, ‘도덕적 공황이 질환의 공식화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로 인해 증가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브라질과 캐나다, 호주 및 유럽 18개국 등 각국 게임산업협회들도 미국, 한국 협회와 마찬가지로 국제 공동 협력 의지를 나타냈다.

2018년 3월, 통계청 “한국은 2025년까지 보류”

세계적으로 ICD-11 초안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를 개정하는 통계청도 직접 입장을 발표했다. 통계청은 초안이 WHO에서 통과되더라도 2020년으로 예정된 KCD에 기준을 바로 적용하지 않고, 다음 개정연도인 2025년까지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분류 추가나 개정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사회적 합의가 우선시 돼야 한다고 통계청은 덧붙였다.

2018년 6월, WHO ICD-11 공개

WHO는 결국 지난해 6월18일 게임이용장애 항목을 포함한 ICD-11을 공개했다. WHO는 게임 과몰입을 ‘중독성 행동으로 인한 장애’ 항목에 편입해 중독의 일종으로 분류했다. ICD-11에 명시된 게임 장애 증상은 △적절한 게임 플레이 시간 조절 불가 △게임과 여타 행동의 우선순위 지정 장애 △게임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 무시 등이다.

2019년 4월, 문체부 WHO에 반대 의견 전달

문화체육관광부와 한콘진은 지난달 29일 ICD-11에 게임이용장애가 포함돼 있는 것에 대해 WHO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달했다. 문체부와 한콘진이 전달한 의견서에는 ‘게임이용자 패널(코호트) 조사 1~5차년도 연구(건국대학교 산학협력단, 정의준 교수)’ 결과와 함께 현재까지 발행된 1~4차년도 보고서 원문이 참고문헌으로 포함돼 있다.

문체부와 한콘진은 의견서에서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은 게임 그 자체가 문제 요인이 아니라 부모의 양육 태도, 학업 스트레스, 교사와 또래지지 등 다양한 심리사회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패널조사 연구내용을 핵심적으로 피력했다. 같은 날 한국게임산업협회도 WHO에 게임 질병화 시도를 반대하는 입장을 재차 피력했다.

2019년 5월, WHO 세계보건총회의 개최

WHO는 이달 20일부터 28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보건총회를 열고 ICD-11 개정안에 게임이용장애를 정신건강 질환으로 등재할 예정이다. 이번 총회에서 안건이 통과되면 게임 중독은 새로운 질병코드로 등재되고, 각국에서는 2022년부터 WHO의 권고사항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병코드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한국은 문화체육관광부와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찬반논란이 첨예한 만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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