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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달이 지났지만 수화기 너머 중국동포 김모(30)씨는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했다. 중국 한족 출신 불법체류자 리룽(李龍·29·가명)·리샤오(李嘯) 쌍둥이 형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경찰 신고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쉬는 날 없이 일해 번 돈이었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 들통나 강제 출국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다. 딱한 사정을 들은 이주노동자 상담가는 “범죄 피해자의 경우 신고를 해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상이 통보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용기를 내서 지난 2월 상담가와 처음 경찰서 문턱을 넘었지만 “불법체류자 사건을 다뤄도 되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일선 경찰관이 ‘통보의무 면제 제도’를 몰랐던 탓이다. 정부는 2013년 3월부터 피해자 구조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불법체류 등 외국인 신상정보를 출입국사무소에 신고하지 않아도 되는 통보의무 면제제도를 시행 중이다.
회색 후드티에 빛바랜 청바지 차림을 한 형제의 어깨는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형제가 공사판 반장인 중국동포 김씨를 따라 경남 김해의 건설현장으로 내려간 것은 지난해 9월이다. 힘들고 위험해 남들이 꺼리는 대표적 3D(Dirty·Difficult·Dangerous) 일자리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되는 건설현장은 형제에겐 최선의 일자리였다. 정식 고용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김씨만 따라다니면 됐다. 비록 일당 일부를 수수료로 떼였지만, 하루 10만원은 형제에게 큰 돈이었다.
임금을 떼인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2012년 처음 한국에 와 건설현장을 떠돌던 형제는 지난 2014년 경기 여주의 한 건설현장에서 처음 임금 체불 피해를 당했다. “돈이 생기면 바로 주겠다”던 사장은 차일피일 지급을 미뤘고 밀린 임금은 1000만원을 넘어섰다. 근로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불법체류자 신분에 한국말마저 서툰 형제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결국 사장은 야반도주했다.
고향인 중국 지린성(吉林省)을 떠나 스물 다섯 나이에 한국땅을 밟으면서 형제는 ‘이모부처럼 딱 10년만 고생하자’ 고 약속했다. 1990년대 중반 무일푼으로 한국에 건너 간 이모부는 10년 간 모은 돈으로 귀국후 버스 두 대를 구입해 굴리면서 사장님 소리를 듣는다. 이모부는 틈만 나면 형제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부추겼다.
형제는 고향을 등지면서 인생역전까지는 아니어도 결혼자금은 마련해 돌아가자고 다짐했다. 브로커를 통해 관광비자를 만드는 데 2400만원이 들었다.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어렵게 마련한 돈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친척들에게 빌린 돈은 지난달 겨우 다 갚았다. 이제 형제가 가진 돈은 70만원 뿐이다. 김씨가 결혼 준비 때문에 급전이 필요하다며 빌려가 갚지 않고 있는 돈은 형제의 결혼자금이기도 했다. 형제는 이제 포기하고 한국을 떠날지 아니면 좀 더 참고 견뎌볼지 고민 중이다. 형제에게 ‘코리아 드림’은 악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