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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서울의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이곳에서 보는 북한산의 아름다운 능선은 변하지 않았다.”
소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과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 ‘라면을 끓이며’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68)이 유년시절과 신혼시절을 보낸 서울 은평구의 북한산 자락에서 독자들을 만났다. 7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연 ‘은평의 작가, 김훈 초청 토크콘서트’를 통해서다. 김훈은 이날 300여명의 청중 앞에서 가족사와 문학에 대한 고민,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 아버지로부터 배운 간결한 문장
김훈은 먼저 아버지 김광주(1910~1973)에 대한 회상으로 입을 열었다. 김광주는 젊은 시절 중국으로 건너가 백범 김구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고 이후 귀국해선 일간지 문화부장과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말년에는 은평구의 기자촌에서 살면서 국내 1세대 무협지 작가로 필명을 날렸다.
김훈은 “아버지로부터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며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가 숱하게 이사를 다녔는데 이사 간 집을 모를 정도로 가정에 무심했다”고 회고했다. 이사 간 집에 찾아와서도 ‘배산임수’가 아니란 이유로 오히려 식구들을 타박했다는 것.
◇ 젊은이들 책망, 어른의 태도가 아니다
김훈은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조선말 천주교 박해를 소재로 한 소설 ‘흑산’의 상황을 빌려 “그때나 지금이나 공론의 장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념과 외래 사조가 부딪치면서 공론화되기보다 바로 대결의 장이 섰고 그것이 박해의 배경이 됐다”며 “공론의 장이 없는 비극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가장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은 부모의 자산으로 자식의 삶이 결정되는 이른바 ‘수저론’ 사회였다. 금수저와 은수저, 동수저와 흙수저에 이르기까지 서열화하는 ‘수저론’은 다시 가난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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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 극복했지만 비리·차별 물려준 셈”
김훈은 “우리 세대는 가난을 극복하고 싶은 일념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며 “밥과 자동차와 집이 넘치는 풍요의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리와 차별과 모순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이어 “아버지세대가 가난과 억압을 물려줬다면 우리는 비리와 모순을 다음세대에게 물려주게 됐다”며 “누구나 자기세대에 문제가 있지만 현재의 잘못된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당부한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감수성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요즘 어린이날은 애초 제정했을 때의 의미는 사라지고 모성애의 이름으로 내 새끼만 호강시키는 날로 변질됐다”며 “인간 모성애의 위대함은 동물과 달리 내 새끼뿐만 아니라 이웃집의 새끼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남의 고통을 알게끔 가르쳐야 한다. 남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세월호 소재 소설, 아직은 계획 없지만…
이날 청중이 한 질문 중에 김훈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것은 신작소설이 ‘세월호’에 관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김훈은 “괴로운 걸 물어봤다”고 운을 뗀 뒤 “얼마 전 세월호 특조위 청문회를 봤는데 이준석 선장에게 종신형을 내린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을 사면할 수 있겠나 싶어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며 “지금 답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없다. 근력이 안 된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어찌될지 모르겠다”고 여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