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피해자인데…가해자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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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당시 재판에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검찰은 노씨에게 강간미수 혐의조차 적용하지 않았다.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만 노씨를 재판에 넘겼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범행 장소와 집이 불과 100m 거리이고 범행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주변 집에 들릴 수 있었다”라며 “혀를 깨문 최씨의 행위는 방위의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판단했다.
재판 과정도 최씨를 고통스럽게 했다. 재판부는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냐”,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거 아니냐”라며 2차 가해를 했다. 언론도 ‘키스 한 번에 벙어리’, ‘혀 자른 키스’라며 가해자인 노씨가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후 이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1995년 발간한 ‘법원사’에도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소개됐다.
사건 이후 노씨의 행동도 가관이다. 노씨는 친구들과 함께 최씨 집에 찾아와 흉기를 책상에 꽂고 행패를 부렸다. 최씨 아버지는 노씨에게 돈을 주고 합의했다.
재판 후에도 트라우마로 고통
60살이 넘은 최씨는 뒤늦게 만학도가 됐다. 10여년 전 부산의 한 2년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지난해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했다.
2018년 사회에서 쏟아지는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운동에 용기를 얻은 최씨는 방통대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그해 12월 ‘한국여성의전화’를 찾았다. 최씨는 변호사, 여성단체, 학교 동기들과 함께 당시 판결문과 기사 등 증거자료를 모으며 차근차근 재심을 준비했다.
사건 56년 만에 용기냈다…재심 청구
최씨는 ‘부산여성의전화’ 등 353개 여성·시민단체와 함께 지난 6일 부산 연제구 거제동 부산지법 정문 앞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건 발생 56년 만이다.
최씨는 이날 재심 청구에 앞서 “사법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후세까지 나 같은 피해가 이어질 수 있겠다는 절박한 생각에 이 자리에 섰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의 억울함이 풀리고 정당방위가 인정돼 무죄가 되기를 바란다”라며 “법과 사회가 변화돼 후손들에게 이런 오점을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최씨는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서’ 서류 봉투를 가슴에 품고 당당하게 법원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바로잡길”…응원 물결
최씨의 또 다른 법률대리인인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5일 MBC 라디오 ‘이승원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현행법은 재심 사유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 사유에 해당하는지가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재심요청 이유 중 하나는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성이다. 이 사건은 경찰수사 단계에서는 불구속이었다가 검찰 조사 첫날 바로 (최씨를) 구속했다”며 “최씨 기억으로는 아버지와 검찰청을 가자마자 구속됐고 그때 영장을 보거나 왜 구속됐는지를 전혀 고지받지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저희는 일단 최씨에 대한 체포 과정, 또는 구속 과정 자체가 그 당시 형사소송법 규정에 위반된다고 해서 수사의 위법성을 가지고 재심청구 사유로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접한 누리꾼들도 한마음으로 최씨를 응원하고 있다.
누리꾼들은 “할머니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ju2l****),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성범죄에는 해당 안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억울하고 선명해지니까”(sksm****), “지난 시대가 큰 슬픔을 낳았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바로잡아 어르신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힘내세요”(fres****), “힘으로 제압한 가해자때문에 입이 막혔는데 소리를 지르래. 드라마는 애들 장난 수준이네. 현실이 더하다”(fait****) 등의 반응을 보였다.
노영희 변호사도 6일 자신이 진행하는 YTN라디오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에서 최씨 사건에 대해 “제가 판례 공부할 때도 참 이해가 안 가는 사건이었다”며 “사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말이 안 된다”라며 최씨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