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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는 ‘정책 협조’와 ‘정경유착’을 가를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정권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기업이 사정칼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고 하소연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묵시적 청탁으로 엮는다면 정부 정책에 협조한 모든 기업의 총수들은 교도소 담벼락을 걷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는 지난 25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이 부회장이 독대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삼성물산 합병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녹취록 같은 명시적 증거는 없지만, ‘묵시적 부정 청탁’은 있었다고 봤다. 삼성이 정유라 승마지원 등에 나선 것은 삼성의 승계 작업을 인식하고 있던 박 전 대통령의 지원을 기대했던 데 따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신동빈 회장이 뇌물공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롯데그룹은 이 부회장의 실형 판결에 초긴장하고 있다. 신 회장은 미르 스포츠 재단에 45억원을 제공한 뒤, 면세점 신규 취득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 측에 부정 청탁한 대가로 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을 추가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부회장처럼 미르 스포츠 재단에 건넨 지원금은 무죄가 적용되더라도, 추가 지원한 70억원은 ‘묵시적 청탁’이라는 논리를 펼 수 있어서다.
재계 관계자는 “형사 재판은 오직 법리와 증거로만 따져야하는 것인데, 묵시적 청탁은 법논리가 아니어서 적지 않은 논쟁을 야기할 것”이라며 우려를 내비쳤다.
서초동의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는 한 형사 전문 변호사는 “재판부가 묵시적 청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는 의미다”며 “단순 뇌물공여와 달리 ‘부정한 청탁’이라는 점까지 입증해야 하는 제3자 뇌물공여죄에 적용하긴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항소심에서는 묵시적 청탁에 대한 판단,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공범관계의 성립여부 등을 더 엄격하게 따져볼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