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두산의 태생적 리스크

  • 등록 2024-09-02 오전 5:30:00

    수정 2024-09-03 오전 11:00:57

[이데일리 이준기 산업에디터] 지난(至難).

대한민국 재계사에 그 어떤 기업이 천고난만의 역사가 없겠느냐마는, 최근 20년정도만 따져본다면 두산에너빌리티처럼 이 두 글자에 딱 어울리는 기업이 또 있을까 싶다.

통상 재계에선 두산그룹의 중간지주사인 에너빌리티를 두산의 버팀목으로 부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보살핌만 주다 떠나보낸 아들만 수두룩하다. 2007년 밥캣 인수 이후 터진 금융위기 탓에 고난의 행군을 걸었던 두산인프라코어, 금융비용도 못 갚던 두산건설 모두 에너빌리티가 메워주고 토닥이다 떠나보낸 자회사들이었다. 말이 좋아 버팀목이었지, 속된 말로 총알받이와 다를 바 없었다.

진짜 문제는 제 사업에서 불거졌다. 탈 석탄 트렌드에 이어 탈 원전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발전시장이 고꾸라지자 체력이 허약해진 에너빌리티가 흔들렸고 이는 곧 그룹 전체의 위기로 번졌다. 구조조정은 혹독했다. 신사업도 접고, 본사 건물까지 팔면서 두산엔 잊지 못할 트라우마가 됐다.

그 배경엔 고질적인 두산만의 구조적 원인, 태생적 리스크가 있다. 바로 ‘수직적 지배구조’.

그래서 꺼내 든 카드가 이번 사업구조 개편일지 모른다. 사업구조를 클린에너지(에너빌리티), 스마트머신(로보틱스·밥캣), 반도체 및 첨단소재(테스나) 등 3대 축으로 재편, 에너빌리티의 중간지주사 역할을 없애 수평적 구조로 독립 경영을 이루겠다는 취지다. 지난주 여론에 밀려 ‘밥캣·로보틱스’ 흡수합병을 포기하면서도 밥캣을 에너빌리티에서 떼어내 로보틱스 자회사로 편입하는 방안을 강행하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쩌면 다시 못 올 기회일지 모른다”는 두산 고위 관계자의 발언에는 글로벌 원전 시장 공략을 위한 절박함도 베어 있다.

밥캣을 떼어내면 에너빌리티는 1조원 이상의 자금 여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 자금은 모두 원전 사업에 투입된다. 국내 유일 원전 주기기 제작업체가 이리 나서면 국가적으로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에너빌리티는 2029년까지 원자로 62기 이상 수주를 목표로 잡고 있다. 불가능해 보였던 체코 원전도 수주한 만큼 기세를 이어간다면 폴란드,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등의 신규 원전 수주도 못 하란 법이 없다. 재계 관계자는 “차입금 7000억원을 안고 있는 밥캣에서 찔끔 배당을 받는 것보다 단박에 자금 여력을 갖추는 게 낫다는 게 두산의 판단”이라고 했다. 실제로 작년의 경우 밥캣에서 700억원 이상의 배당금을 받았지만, 이자비용만 500억원이 넘어 배당 효과는 크지 않았다.

에너빌리티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로보틱스·밥캣 흡수합병 포기라는 플랜B에 대해서도 여론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밥캣의 주식매수청구권은 사라졌지만, 에너빌리티·로보틱스의 주식매수청구권이 유지되는 점도 부담이다. 이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SK E&S 간 합병에 반대 의견을 낸 바 있는 ‘2대 주주’ 국민연금의 스탠스도 복병이 될 수 있다.

이번 두산의 사업구조 개편 플랜B가 어떤 식으로 귀결될진 예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에너빌리티가 수적적 지배구조에서 탈피해 에너지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덴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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