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경기 불황으로 스타트업들의 기업가치(밸류에이션)가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 스타트업 대표가 한 말이다. 그간 스타트업 전성시대가 이어지며 비슷한 서비스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상황에서 인수·합병(M&A)을 통한 스타트업간 통합(consolidation) 작업이 봇물 터지듯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곳간을 어느 정도 채운 스타트업들은 이러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어려움을 겪는 경쟁사를 인수해 몸집 불리기에 한창이다. 비슷한 유형의 서비스를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제공하느냐로 경쟁 우위를 가리던 이들이 이제는 인수 혹은 통합 대상으로 떠오른 셈이다. M&A를 통한 스타트업 간 통합 작업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이를 통해 창업 생태계가 한층 더 성숙해질지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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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피치북 등에 따르면 M&A를 통한 스타트업 간 통합 작업이 본격화하며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글로벌 식료품 배달 스타트업인 게티르의 동종업계 스타트업 ‘고릴라스’ 인수가 이러한 트렌드의 시작점이 될 것이란 게 피치북 설명이다. 터키 기반의 게티르는 최근 12억달러(약 1조5700억 원)에 고릴라스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고릴라스가 시장에서 평가받은 밸류에이션(31억 달러) 대비 반절 이상 하락한 수준이다.
탄탄한 기반 다지기 과정 없이 유독 빠르게 몸집을 키운 탓일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서서히 완화되는 와중 경기 불확실성이 덮치자 고릴라스와 비슷한 초고속 배달 업체들의 성장세가 무서운 속도로 꺾이기 시작했다. 이에 고릴라스도 직원 해고를 비롯한 비용절감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업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매각을 택했다.
피치북은 “스타트업 대 스타트업 거래는 밸류에이션 측정 차원에서 협상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면서도 “이는 다운라운드(down round, 후속 투자를 유치할 때 이전 투자 때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받는 것)와 IPO 불확실성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M&A 파도탄 업계도…핀테크·헬스케어·데이터 속속
글로벌 M&A를 통한 스타트업 통합 양상은 올해 3분기까지 이어졌다. 글로벌 헬스케어 리서치 기관 록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부터 3분기까지 미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산업에서 이뤄진 M&A는 총 144건에 달한다. 록헬스는 “불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보다 동종업계 내 M&A를 선호하는 스타트업이 늘어나고 있다”며 “제품력과 팀을 강화하며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와 같이 밸류에이션 디스카운트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M&A가) 오히려 반가운 조건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는 비단 해외만의 현상은 아니다. 원격의료 플랫폼 닥터나우는 올해 4월 헬스케어 스타트업 ‘부스터즈 컴퍼니’를 인수했다. 부스터즈 컴퍼니는 개인 맞춤형 운동 콘텐츠를 제안하고 의료 전문가를 통한 상담·관리를 지원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앱을 여럿 선보인 업체다. 이를 통해 닥터나우는 비대면 진료 및 처방약 배송 서비스를 고도화한다는 목표다.
이 밖에 핀테크와 데이터 플랫폼을 운영하는 스타트업간 합종연횡도 이어진다. 대출 플랫폼 ‘핀다’는 올해 7월 빅데이터 상권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오픈업을 약 180억 원에 인수했고, 명함 플랫폼 ‘리멤버’를 운영하는 드라마앤컴퍼니는 올해 4월~7월에 걸쳐 전문가 네트워크 서비스를 운영하는 ‘이안손앤컴퍼니’와 신입 채용 전문 플랫폼을 운영하는 ‘루키 코퍼레이션’, 동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앵커리어’ 등을 인수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내년에도 이러한 경기 불확실성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스타트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며 “당분간은 이러한 스타트업간 통합 사례가 두드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피인수 기업뿐 아니라 인수 기업도 동일한 환경에 처한 만큼, 합병한다고 해서 바로 수익을 창출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며 “M&A를 통해 사세 확장에 성공할 경우 생태계는 한층 성숙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