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줌인] ‘나의 해방일지’와 정신건강의 함수

이영문 국립정신건강센터 센터장
  • 등록 2022-08-21 오전 8:08:09

    수정 2022-08-21 오전 8:08:09

[이영문 국립정신건강센터 센터장] 요즘들어 정신건강에 대한 담론이 점차 커지고 있다. 심리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현대인의 초상이 언론과 영화, 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한다.

이런 면에서 최근 종영된 ‘나의 해방일지’는 자기(self) 심리학의 교과서를 옮겨놓은 듯하다. 주연 배우들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대사로 채웠다. 자유를 넘어선 해방, 사랑과 존경을 넘어선 추앙이라는 일상생활에 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오래도록 머리속에 남아 있다. 자기(자아가 아니다)개
이영문 국립정신건강센터 센터장
념은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다.

우리 주변에 팽배한 공동체적 사고보다는 워라벨로 대변되는 자신의 삶을 더 중요시하는 세태를 반영한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자기 심리학의 발견으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균 수명의 연장은 나이듦과 연동해 정신질환의 발생률을 증가시키고, 복합적인 사회현상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들이 전 시대보다 커지고 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를 정의할 수 있는 질병이 존재한다. 가령, 지난 20세기를 면역의 시대로 정의할 수 있다. 나(我)와 타인(他人)의 끝없는 긴장과 대립관계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로 인해 질병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타자가 된다.

공존이 아닌 대립의 20세기에 비해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질병이 빈번해지고 있고, 아직 그 치유방법이 명확하지 않다. 마음의 치료는 20세기 동안 크게 두 가지 변화를 거치고 있다. 하나는 정신분석(psychoanalysis)으로 불리는 프로이트 등 정신치료자들의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신경과학(neuroscience)으로 묶을 수 있는 생물학적 견해이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인간 마음에 대한 위대한 접근이다.

마음을 탐구하고 치유하려는 노력들이 20세기 이후 우리 삶의 영역에 들어왔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들도 많은 수정을 통해 발달되어 왔다. 더욱이 신경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이론들은 몸과 마음, 뇌와 마음, 정신과 물질에 대한 담론을 풍성하게 펼치고 있다.

모름지기 인간은 생각하는 힘과 감정을 느끼는 힘의 조합으로 살아간다. 감정이 동반되지 않은 생각이나, 생각 없이 감정만으로 전해지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혹 존재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하고 허물어진다. 생각과 감정의 조화를 쉽게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불편한 관계들이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프로이트의 유아적 소원은 이제 의학을 넘어 인문학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과학에 대한 실증적 연구방법론에 따라 철학의 개념뿌리들도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는 종교, 문화, 예술,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신분석 또한 시대적 산물이기 때문에 동시대의 담론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말로 모든 것을 이야기 할까? 때로는 ‘말하기’ ‘듣기’보다도 몸으로 ‘보여주고’, 눈으로 ‘보는’ 과정 속에 서로 통하고 상처가 어루만져지기도 한다. 어쩌면 태어나서 사랑받고, 사랑하고, 상처주고, 상처받고,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관계 맺었다가 다시 배신당하고,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고. 뒤뚱뒤뚱 홀로 걸어가는 이 세상 많은 일들이 모두 정신건강의 문제들이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듯 우리 주변을 맴돈다.

사람은 다양하지만, 상처받는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인정받기를 갈망하지만 실패하고, 자기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수없이 하지만, 다람쥐 체바퀴 돌 듯 달의 궤적을 무한 반복할 뿐이다.

덧없는 무한반복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난다. 소위 무의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신현상이다. 정신건강의 함수는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모든 관계의 어긋남이나 일치에서 오는 기쁨이 모두 무의식에서 시작된다. 정신건강의 정상성을 정의하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물리적 차원으로 보자면, 시간이 무수하게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무한 반복하게 한다. 반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시간의 조각들 사이에 어떤 연속성도 성립하지 않는 세계이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신건강에 대한 편견은 시간의 무한반복성을 부정하는 결과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살려는 욕망에 대한 매순간의 찬반투표이다. 매일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삶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다. 존재를 지속한다는 것은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개인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재생력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손석구)와 염미정(김지원)은 과연 무한반복되는 일상을 잘 견디어내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해방된다는 것’은 세상과 나의 관계 속에서 지루한 반복을 통해 생명을 느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과거에 했던 행동이 오늘 다시 반복되더라도 놀라거나 주눅들지 말자. 비록 그 행동이 의미가 없더라도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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