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총으로 쏘기 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한 말입니다. 현장의 증언이 엇갈리고 녹취도 없어 실제로 이 말을 김 전 부장이 했는지는 묘연합니다. 다만 체포된 후 자신의 행동이 대의를 위한 것이었음을 줄곧 강조한 김 전 부장에게는 대통령에게 했다는 그 말이 상당히 의미가 있었을 법합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대의가 진실인지는 법원에서 일부나마 판가름 날 가능성도 생겼습니다. 김 전 부장 유족들이 고인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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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부장은 박 전 대통령을 총으로 사상케 한 1979년 10.26 사건으로 체포돼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판결 확정 나흘 만에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번에 김 전 부장 여동생을 대리해 재심 청구서를 제출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재심 근거 핵심 근거로 최근 발견된 재판 녹음테이프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보안사령부가 ‘쪽지재판’을 통해 재판에 개입한 사실이 해당 녹취에 드러나고, 공판조서 역시 당시 발언 그대로 적히지 않아 재판의 적법성 문제를 지적합니다.
또 대법원 상고 기각 당시 내란목적 혐의에 대해 8대6으로 대법관 의견대립이 있었던 점도 재심을 다툴 여지가 충분한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열람금지 조치된 판결문은 뒤늦게 공개됐습니다. 판결문에는 소수의견으로 ‘김재규가 내란목적을 가졌음을 입증할 수 없고 우발적 살인이라고 봐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음이 확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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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이미 유죄 확정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하여 다시 재판을 볼 수 있는 조건으로 일곱 가지 사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족 측은 근거로 제시한 녹취 테이프가 이 가운데 1항 “원판결의 증거된 서류 또는 증거물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위조 또는 변조인 것이 증명된 때”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녹취를 들어보면 공판조서가 허위로 작성됐을 가능성이 많아 위조된 증거에 의한 판결이라는 것입니다.
유족 측은 또 재판 과정에서 김 전 부장에 대한 고문 등 불법행위가 이뤄진 점도 지적합니다. 7항은 “판결의 기초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를 재심 사유로 인정합니다. 새로 나온 녹음 테이프에는 김태원 당시 중앙정보부 경비원이 ‘다른 취조실에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수사관이 곡괭이 자루를 들고 다니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했다’고 말하는 법정 최후진술이 확인되는데, 이는 수사관들의 명백한 불법행위를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5항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 또는 면소를, 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형의 면제 또는 원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경한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로 이번 증거물의 사례를 포괄적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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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사건 당사자인 김 전 부장은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이미 나는 이겼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법리적으로 이 사건의 재심 청구를 인용할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러한 사정을 알기에 유족들은 “재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라기보다는 역사”라고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족측은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 김 전 부장의 진의가 어디까지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유족이 말한 것처럼, 이번 재심 청구가 그러한 논의를 양지로 끌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