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사업부문을 분리하는 LG화학의 물적분할 계획은 초반부터 개인투자자의 반발을 불렀지만 시장은 안건이 무난히 주총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주총에 앞서 시장의 ‘큰손’ 기관투자자 표심에 영향을 미치는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래스루이스 등이 찬성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내놨기 때문이다. SK이노베이션(096770)과 포스코(005490)의 물적분할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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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결권 자문사(Proxy advisory firms)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의 의결권 행사 방향 결정을 돕는 역할을 한다. 수백, 수천 곳에 투자하는 큰손들이 모든 기업의 주주총회 안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불가능한 만큼 분석 업무를 대신해 의결권 행사 방향을 잡아주고 수수료를 받는다. 자본시장의 숨은 큰 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국내 대기업의 물적분할을 좌지우지하는 의결권 자문사들의 보고서는 어떻게 탄생할까. 현재 주요 의결권 자문사로는 외국계 2곳, 국내 3곳 등이 있다. 외국계 자문사 ISS와 글래스루이스는 세계적인 대형 의결권 자문사다. 1985년 설립된 ISS는 3000여 고객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글래스루이스 역시 1300여 고객을 자랑한다. 이들의 결정이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규모다.
하지만 초점을 ‘국내’로 좁히면 얘기가 달라진다. ISS와 글래스루이스 두 곳 모두 한국 기업을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한국 담당 인원은 많지 않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ISS의 한국 담당 인원은 5명, 글래스루이스는 이와 비슷하거나 약간 적은 수준이다. 사무실 역시 일본과 호주 등 외국에 있다.
ISS와 글래스루이스가 모두 찬성을 권고했던 LG화학의 주가는 배터리 사업부문 분사 소식과 결정 등에 따라 요동친 바 있다. 한 기관투자자 관계자는 “해외는 쪼개기 상장이 금지돼 있어 이런 사례가 많지 않다 보니 물적분할에 따른 주주가치 하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했다는 분석이다.
주주총회가 몰리는 매년 2~3월에는 5명이 채 안 되는 인원으로 수백 개 기업의 안건을 들여다보기가 불가능해 임시 인력을 고용해 보고서를 만들기도 한다. 시간과 전문인력이 부족하니 기업이 내놓은 계획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여 의결권 행사 방향을 권고한단 지적도 있다.
다만 이들도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눈여겨 보고 있다. 글래스루이스는 샌프란시스코와 시드니에 있던 한국 담당 인력을 지난 2020년 초 설립된 도쿄 사무소로 옮긴 바 있다. 한국 인력 관련 문의에 대해 글래스루이스 관계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팀의 인력 수준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내 자문사, 신뢰성 제고 필요”…제도 마련 지지부진
이와 비교하면 국내 자문사는 국내 자본시장과 기업 특성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국내 자문사 역시 인력이 많지 않은 편이고 업력이 짧은 점도 한계로 꼽힌다. 국내 주요 자문사 인력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의 책임투자팀이 9명, 대신경제연구소 관련 인력이 10명 내외, 서스틴베스트가 5명 내외 수준이다.
지난 2019년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국내 의결권 자문사 관련 현황 및 향후 과제)에서 국내 자문사의 문제점으로 △공정성 담보 장치 미비 △정확성·투명성 확보 방법 부족 △전문성·역량 담보 장치 미비 등을 꼽았다. 입법처는 “국내 자문사는 의안분석 업무 수행 경력이 상대적으로 짧아 자문 서비스를 평가할 만한 시장 평판이 확립돼 있다고 보기 어렵고, 별도의 규제나 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봤다.
해외는 자문사 영향력을 고려해 견제 장치를 두려는 시도가 있지만 국내는 관련 제도가 미비하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초 의결권 자문사 관련 가이드라인을 2021년 중으로 만들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해를 넘겼다. 금융위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는 등 논의를 진행 중”이라며 “결과가 나오는 구체적인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본시장에서 의결권 자문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꾸준히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고려하는 책임투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고, 자문사의 주요 고객인 기관투자자의 운용 자산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주주총회에서 큰 고민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면 이제는 의결권 행사가 여러모로 중요해지고 주목도 많이 받고 있다”며 “의결권 자문사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은 물론 이들의 역할을 둘러싼 논의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