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어쩌면 나도 '기생충'인지 모른다

  • 등록 2019-06-17 오전 5:00:00

    수정 2019-06-17 오전 5:00:00

[신세철 전 금융감독원 조사연구 국장·‘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 저자] 한국경제가 무기력 증상을 보이는 것은 공동체의식 마비로 동기양립(動機兩立·incentive compatibility) 기틀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누구나 열정을 가지고 노력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사회에 기여하면 정당한 보상을 받을 때 성취동기를 가지며 이는 사회의 성장과 발전의 바탕이 된다. 동기양립 프레임이 망가지면 누군가가 불로소득
을 얻는 대신에 다른 누군가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 공동체의식은커녕 불신과 갈등이 조성된다. 심해지면 ‘벌 받을 자가 상을 받고, 상 받을 자가 벌 받는’ 막장사회가 된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던 까닭도 공동체 의식이 파괴됐기 때문이었다. 민생은 외면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위장된 명분’으로 아귀다툼을 하는 것이 지도층의 일상이었다. 가렴주구에 시달린 백성은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데, 왕권을 확립한답시고 궁궐만 높이 세우려 하니 공동체의식이 풍비박산 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먹물 먹은 자’들이 저만 살려고 앞 다투어 외세에 빌붙는 비극적 상황이 전개됐던 것은 모두 동기양립 시스템이 파괴됐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했던 순간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돈이나 권력을 거머쥘수록 공연히 우쭐대거나 힘없는 이들한테 더욱 야박한 행태를 보이기 쉽다. 낙하산을 타고 공짜로 감투를 쓴 인사들은 정당성을 위장하기 위해 조직을 장악하려 기를 쓰다가 조직을 망쳐버린다. 파벌을 부추기며 가짜 ‘의리’를 부르짖던 그들은 기회주의 습성에 따라 상황이 바뀔 조짐만 보여도 뒤돌아선다.

우리나라만 그렇지는 않지만, 동기양립 시스템이 자리 잡기 어려운 곳이 공직사회다. 최근 이데일리의 ‘공공기관 리포트’ 시리즈는 공직자 상당수가 보신주의 늪에 빠져 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가장 많이 하는 변명 아닌 변명이 “관행이다” “검토해보고” “당장 어렵다”라는 말로 무엇이든 흐지부지 넘어가려고 할 뿐이지 업무개선에 도통 관심이 없다고 한다. ‘주인이 바뀌어가는 조직’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는 그레샴의 법칙이 들어맞는 까닭은 조직과 사회가 아니라 실력자를 위해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인가?

공직자 숫자가 많아질수록 동기양립 체제가 불분명해지며 나라살림은 어려워질 가능성이 커진다. 생각해보자. 재정적자가 바로 코앞의 걱정으로 와 있는 판국에, 공무원연금 충당부채가 물경 800조원을 훨씬 넘어가는데도, 17만 명이 넘는 공무원 증원을 걱정하는 관료는 없다고 한다. 그들은 어이하여 AI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입바른 말을 않으면 개인의 미래는 몰라도 나라의 미래를 보장하기 어렵다.

문제는 그들이 사회를 위해 일하지 않고 세월을 바꿔가며 눈치만 보더라도, 납세자들이 평생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덧붙어서 숙주(host)를 갉아먹다 병들게 하는 벌레를 기생충이라 부른다. 곳곳에서 제 할 일을 찾기보다 책임부터 회피하려는 보신주의, 공동선을 파괴해가며 사익만 취하려는 기회주의가 집단이기주의로 변형된 지 이미 오래됐다. 사람들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다가 공연히 이질감과 적대감을 조성하며 욕지거리만 해대는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는 ‘기생충 전성시대’에 살고 있는가? 어쩌면 나도 기생충인지 모른다.

이 뿌리 깊은 사회병리현상은 공동체의식을 말살시켜 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인 동기양립의 틀을 허물어트리고 있다. 한국경제가 굴곡을 벗어나서 선진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불필요한 자리를 극소화하고 사회보상체계를 정립하여 불로소득을 최소화시키는 일이다. 사회안전망이 확충되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공동체의식 회복이 보다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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