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8월 1일 오후 9시 20분께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C 커피숍에 내연녀 이 모(36) 씨와 폭행부분에 대해 합의를 보러 갔지만, 서부경찰서 소속 심모(사망 당시 32) 경사 등 2명이 이씨를 긴급체포하려 하자 이들을 흉기로 찔러 살해 후 자신의 택시를 몰고 달아났다.
이어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이씨의 택시는 2일 오전 8시 55분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주택가에 버려진 채 발견됐지만, 경찰은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이에 경찰은 시민제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현상금 2000만 원을 내걸고 이씨의 사진과 인적사항, 인상착의를 담은 수배전단을 긴급히 제작해 배포하는 등 공개수배했다.
이씨가 공개수배되자 경찰에 하루 수십 건의 제보전화가 들어오면서 경찰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추적 사흘째인 3일 오후 4시께 경찰은 이씨의 주민등록번호로 가입된 인터넷 사이트 ID가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모 아파트에서 접속했다는 첩보를 입수해 4일 낮까지 경찰 400여 명을 동원, 가가호호 방문해 수색을 벌였다.
그러나 돈암동 아파트 수색은 초등학생이 수배전단에서 알게 된 이씨의 주민등록번호를 훔쳐 접속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5일 숨진 두 경찰관의 영결식이 열렸다.
수사가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경찰은 사건발생 6일 만에 이씨의 검거에 현상금을 최고액인 5000만 원으로 인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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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씨의 도주 8일 만인 8월 8일 오후 6시 40분께 서울 강서경찰서 공항지구대에는 “경관 살해범이 침입했으며, 아기와 내 어머니가 함께 있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이씨는 이날 오후 2시께 강서구 방화3동 H 빌라 2층 열린 창문으로 침입, 손녀(4)와 함께 안방에 있던 주부 박모(48) 씨를 위협했다.
침입 순간 “내가 경찰관을 죽인 범인”이라는 이씨의 말에 놀란 박씨는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씨에게 “국수를 끓여 주겠다”면서 국수와 과일을 내주고 대화를 하며 범인을 안심시켰다.
이어 박씨는 4시간여가 지난 오후 6시40분께 이씨가 한눈을 파는 틈을 타 경기도 광명에 사는 아들 신모(28)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학만으로 보이는 남자가 집에 들어왔다. 경찰에 빨리 신고하라”고 말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오후 6시55분께 이씨의 검거에 성공했다. 검거 직전 경찰이 들이닥치자 이씨는 소지했던 흉기로 복부 등을 여러 차례 찌르는 등 자해소동을 벌였다.
이씨는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오후 8시55분께 봉합수술차 수술실로 옮겨졌으며, 호송되는 과정에서도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이씨의 도주극은 시민의 침착한 대응과 신속한 신고로 사건발생 8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이들 모자는 경찰이 내건 ‘이학만 현상금’ 5000만 원을 받았다. 또 박씨에게는 ‘용감한 시민상’, 신씨에게는 ‘감사장’이 각각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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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범행 후 붙잡힐 것을 우려,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부근 야산에서 숨어지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는 주간에는 인적이 없는 숲이 우거진 동산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방화대교 옆 한강둔치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와 물을 빼 마시며 연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가 차량 검문에 걸리지 않았던 건 범행 다음날 구로동에서 승용차를 훔쳐 곧바로 방화대교 부근으로 이동한 뒤 일체 차를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이씨의 가족과 친구 등 이씨가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을 모두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씨는 노숙자와 같은 떠돌이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교화의 여지 남아 있다” 이학만 사형→무기징역 감형
2004년 12월 2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피고인은 우발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범행 수법이 매우 잔인할 뿐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공권력에 정면 도전한 만큼 극형이 불가피하다”고 밝히며 이씨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2005년 2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사전에 경찰관 살해를 계획한 것이 아니었고 이씨가 범행 일체를 자백하며 반성하고 있어 앚기은 교화의 필요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