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보수적이라는 대한민국 금융권에서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했다. 정보통신(IT)개발자에서 시작해 CEO 자리까리 오른 권숙교(55) 우리FIS 사장이다. 우리금융그룹 CEO 역사상 여성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의 어느날, 이데일리가 그녀를 만났다.
"사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금융권에서 IT는 인정받지 못하는 분야였고, 우리금융 내에서도 외부에서 온 인사가 3년 이상 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준비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기회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운도 많이 따랐어요."
의아했다. 여성인 그녀가 10년이나 시쳇말로 `버티는` 이유를 모두가 궁금해했다. 갖가지 억측도 난무했다. 그러나 그녀와의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던 건 30년 프로그래머로서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녀의 `전문성`이 그녀를 이곳까지 오게 했다는 점이다.
관련 학문을 모조리 독파했다. 대학원에서는 컴퓨터사이언스를 공부했고, IT에도 비즈니스지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경영학도 접수했다. IT만으로도 충분히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위치에 올랐지만, 생소한 금융메뉴얼을 집까지 들고와서 공부했다. 어느덧 그녀는 IT와 경영, 프로그래밍 전반을 볼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여성공학인대상`, `국가경쟁력대상`, `여성정보인상`, `최고경영자상` 등 수많은 타이틀은 그녀의 일관성과 전문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성으로서 사장이 되기까지 힘든 일은 없었을까. 그것도 남자가 대부분인 IT 및 금융 분야에서 말이다.
"어디를 가도 늘 여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밤새서 하는 업무가 많았는데 모두들 여자니깐 밤을 못샌다고 생각했어요. 남자보다 2, 3배는 해야 인정받는 시절이었죠. 누구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원칙을 갖고 일하니 이자리까지 오게 됐네요."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는다. 통상 여성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면 남성처럼 술도 잘 마시고, 남성들만의 문화에 함께 어울리는 여장부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녀는 다르다. 술 한 잔 거나하게 마시고 서로의 흐트러진 모습으로 형님, 동생 하며 공과 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문화를 그녀는 거부했다.
"직원들 스스로가 직장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때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도한 변화들이 향후 어떻게 평가될지는 모르겠지만 직원들이 `내가 이 직장에서 인정받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사장에서 물러나 밖에서 이 회사를 볼 때 늘 흐뭇했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최초이자 프로그래머 출신 최초로 금융IT 분야 CEO가 된 그녀의 꿈은 무엇일까. 권 사장은 우리 사회의 IT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IT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정작 경영진들은 IT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장애만 안나게 하라`고 요구하는 문화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나아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는게 그녀의 계획이다. "여전히 남녀차별이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본인의 열정과 실력, 그리고 절실함으로 꿋꿋히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멘토가 되어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그녀의 얼굴이 수줍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