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3년 4월19일 오전 11시45분께, 서울과학고등학교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러더니 학교 주변에 있는 식당에 총격이 가해졌다. 총성은 단발이 아니라 연발로 들린 점에 미뤄 권총이 아니라 군에서 쓰는 개인화기같았다. 도대체 대낮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택가, 그것도 학교 근처에서 군에서나 들릴 법한 총성이라니. 영문을 모르는 주민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 임채성 일병이 부대에서 가지고 나와서 총격전에 쓴 K1 소총.(사진=문화방송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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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이날 새벽 5시 강원 철원군의 한 육군 부대에서 비롯했다. 이 부대에서 복무하던 육군 일병 임채성은 탈영을 감행했다. K1 소총과 실탄 130발, 수류탄 18발을 가진 중무장한 상태였다. 임 일병은 부대 인근 마을 민가에서 주민을 위협해 봉고 승합차를 탈취하고서 서울로 향했다.
비상이 걸린 군은 주요 길목에 검문소를 설치했으나 허사였다. 미숙한 검문과 늑장 보고 탓에 임 일병은 유유히 검문소를 통과했다. 발목이 잡힌 건 서울에 거의 다다른 남양주시 광릉검문소. 그대로 도망한 임 일병을 태운 차량은 서울 동대문 한 호텔로 향했다. 이게 오전 10시 반쯤 상황이다. 주차장에서 쉬던 임 일병은 추적을 눈치채고 다시 차를 몰아 혜화동으로 갔다. 그러다 서울과학고 앞에서 검문에 걸리자 총을 발사한 것이다.
현장에서 임 일병을 검문한 경찰관이 곧장 대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권총을 든 상태에서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임 일병을 당해내기는 어려웠다. 극단에 몰린 임 일병은 주택가에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갖고 있던 수류탄을 투척해 터뜨렸다. 안타깝게도 오토바이를 타고 주변을 지나던 50대 남성이 총에 맞아 숨졌고, 주민 여럿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애먼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부상자 가운데는 30대 여성인질도 있었다. 이 여성은 길을 지나다가 어린이와 함께 임 일병에게 인질로 붙잡혔다. 총격전을 벌이던 임 일병은 차량을 탈취해 군경과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인질을 방패로 삼은 것이다. 인질로 잡힌 여인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과정에서 임 일병이 쏜 총에 맞았다.
상황은 이날 12시4분께 종료했다. 임 일병은 군 요원이 쏜 총에 복부와 다리를 맞아 더는 저항하지 못하고 체포됐다. 중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간 임 일병은 목숨을 건졌다. 부상한 여인도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었고, 어린이는 다행히 외상이 없이 구출됐다.
| 1993년 4월19일 임채성 육군 일병이 은신한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택가 일대에 출동한 군 요원.(사진=문화방송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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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일병의 탈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92년 11월 부사관으로 입대하고서 근무지를 이탈해 구속됐다. 당시 철원 군부대에 병으로 재입대 하는 조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전방에 배치된 임 일병은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 사병으로 분류됐다. 이번 탈영의 배경도 군 복무에 대한 부적응으로 알려졌다.
문제에 문제가 겹친 사건이었다. 문제 사병 임 일병이 맡은 보직은 군수 병이었다. 군부적응자에게 총기를 다루는 역할을 맡긴 것이었다. 군경 대처도 도마에 올랐다. 수도경비사령부가 사건을 인지(8시20분)한 건 탈영 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알고서도 무장 탈영병의 서울 진입을 막지 못했다. 어쩔 수없이 경찰에 협조를 요청(10시35분)했는데 상당히 뒤늦은 시각이었다. 이때 임 일병은 동대문 인근 주차장에서 휴식을 취하며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혜화동 일대는 강북구 수유동의 4·19묘소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다. 같은 날 오전 김영삼 대통령 등 정부 요인이 참배하러 다녀간 장소다.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임 일병은 군사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