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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은 ‘서민들의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민간단체에서 설립한 기관’을 뜻하는 복지원의 이름을 달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창살이 촘촘히 쳐 있어 ‘철옹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육군 부사관 출신인 박인근은 1962년에 장인에게서 형제육아원을 인수하고 1965년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획득해 시설을 빠르게 확장시켜 나갔다. 1975년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 보호 위탁계약’을 맺고 국유림을 헐값으로 불하받아 1980년대까지 개신교계 부랑인 보호시설인 형제복지원을 운영했다. 그는 사회복지 사업의 거물로 이름을 날리며 전두환 정권에서 ‘부랑아 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과 1984년 각각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까지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탈출자들에 의해 까발려진 그의 악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등을 납치해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 시키며 각종 학대를 일삼았다.
형제복지원은 이들을 가둔 뒤 강제 노역은 물론 구타, 성폭행 등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 대해 암매장을 자행하면서 스스로의 만행을 철저히 은폐했다. 박인근이 확인한 513명의 사망자 중 70%가 노숙자가 아닌 가족과 멀쩡한 직장이 있는 일반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강제 노역 등에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죽이고 암매장을 했고, 일부 시신은 300만~500만 원에 전국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이 저지른 만행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유대인을 수용했던 ‘아우슈비츠’ 못지않을 정도였다. 그 참혹함에 형제복지원은 이후 ‘한국의 아우슈비츠’로 불리기 시작했다.
검찰은 1987년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을 수사해 불법 감금 혐의 등으로 기소했지만 대법원은 1989년 7월 정부 훈령에 따른 부랑자 수용이었다며 그의 불법 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박 원장은 건축법 위반과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돼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받는데 그쳤다. 박 원장에 대한 훈포장은 2018년 7월에서야 박탈됐다.
진실화해위, 35년 만에 국가 책임 인정...국가가 정치 목적 활용하기도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입소자는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총 3만8000여 명이었다. 마구잡이식 부랑인 단속 및 수용의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법률 유보·명확성·과잉 금지·적법 절차·영장 주의 원칙 등을 모두 위반한 것으로 파악됐다. 형제복지원에 시민을 수용하는 과정엔 경찰과 공무원들이 동원됐다. 정부는 매년 10억~20억 원의 예산까지 지원했다. 국가 차원의 축소·은폐 정황도 확인됐다.
형제복지원이 수용자들에게 정신과 약물을 과다 투여해 화학적 구속을 한 정황도 드러났다. 특히 형제복지원 사망자 수는 기존에 알려진 552명보다 105명 늘어난 657명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국가가 형제복지원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 사실도 드러났는데,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반공법 위반자도 다수 강제 수용됐다.
형제복지원 부지는 매각돼 이후 아파트 등이 들어섰으며 복지원은 단죄를 받기는 커녕 결과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겼다. 지난해 9월 호주의 한 유력 언론 매체는 박 원장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배후에 있는 가학적인 독재자에 비유하며 그의 가족이 시드니에 약 140억 원 규모의 골프 연습장과 스포츠 센터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72명은 지난해 12월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1인당 5000만 원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