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최연소(27세) 민의원에 당선된 후 9선 의원을 지낸 그의 정치 역정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 그 자체라 할 만하다. 일찍이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아 의로운 길을 고집했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직무 정지와 헌정 사상 첫 현역 의원 제명이란 고초를 겪으면서도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저항한 신념의 정치인이다. 결국 이 사건은 부마 사태로 이어져 18년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는 단초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양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 관계”로 표현했듯이 두 사람은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앙숙이었다. 양김의 화해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인 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병으로 비로소 이뤄진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양김의 화해가 조금 더 일렀다면 민주화도 앞당기고 외환위기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정치인들은 나라의 분열상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지금이야말로 양김의 때늦은 화해를 교훈 삼아 국민 통합에 힘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