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이어 규정완화에 난색을 표해 왔던 미국 금융회계기준위원회(FASB) 역시 개정 방침을 시사하며 시가평가 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이 가운데 시가평가 폐지 옹호론자들은 금융위기의 조속한 치유를 위해 시가평가제 폐지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시가평가제를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위기를 더욱 키울 수 있다는 논리다.
◇ 금융위기로 시가평가 맹점 `부각`
시가평가(mark to market)는 자산의 가치를 매입가격이 아닌 시장가격으로 평가하는 회계로 가격이 상승할 때는 득이지만 시장가격 하락시에는 손실처리되면서 자본을 줄어들게 한다. 공정시장가격(fair market valu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80년대 이래로 투명한 회계를 한다는 명목하에 시가평가는 금융기관 회계에 널리 적용돼 왔다. 물론 모든 자산과 부채에 적용되지는 않았으며, 각국의 사정에 따라 적용시점도 다르기는 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12개 대형은행의 자산 8조4600억달러 중에 시가평가를 하고 있는 곳은 29%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금융위기가 깊어지자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29%라도 벗어버리고 싶은 족쇄가 됐다.
금융기관들은 시가평가로 인해 수십억~수백억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손실 발생과 자산상각이 잇따랐고 규제당국이 규정하는 자본 수준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을 중심으로 시가평가 폐지에 대한 요청이 잇따랐고, 미국 의회 역시 자발적으로 시가평가 폐지 요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시가평가 폐지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금융위기로 자산시장이 붕괴되면서 정확한 자산가치 측정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장이 잘 작동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은행자산의 현실적 측정을 힘들게 하면서 심각한 가격 훼손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시장이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장이 완벽하다는 것을 상정한 시가평가를 계속 고집할 논리적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AAA등급의 CDO 트랜치조차 30%나 상각해야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75%에서 부도가 나야하고 주택 가격도 지속적으로 하락해야만 한다. 유동성이 고갈된 금융위기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주장이다.
또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자산의 가격이 전체 시장의 유동성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유동성이 고갈돼 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땡처리(fire sale) 가격'까지 떨어지게 된다는 것. 특히 매수자 입장에서는 정보가 충분치 못해 이를 상쇄하기 위해 가격을 더 낮추게 되고, 균형가격 자체가 더욱 더 아래쪽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
칸 졸스키 공화당 의원은 "신용손실과 유동자산 손실을 구분해야 한다"며 "신용손실은 대출자 상환이 불가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자산이 상각되고 재무제표 상에서도 제거되야 하지만, 단순한 유동자산 손실의 경우 시장에 다시 유동성이 돌기 시작하면 상환이 가능한 만큼 자산매각 시까지 손실로 인식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좀더 넓게 보면 시가평가가 금융시스템의 변동성을 키워 위기를 더욱 확대시켰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규제당국이나 의회 모두 시가평가 적용으로 경제주기의 등락이 심화됐다는 입장이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 역시 시가평가 폐지 자체에는 반대를 표명하면서도 "규제가 금융시스템의 저점과 고점을 모두 강화했다"며 일부 개선을 요청했다.
◇ 감독당국 시각 `선회`..의회·금융기관 신속한 마련 촉구
최근 FASB는 물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통화감독청(OCC) 모두 투명성을 들어 시가평가 규제 완화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의회의 강한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12일(현지시간) FASB는 3주 안에 시가평가 관련 완화 규정을 마련하겠다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로버트 허츠 FASB 위원장은 미국 의회에 출석해 "시가평가 규정 적용과 관련한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앞서 SEC 역시 시가평가 완화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SEC의 경우 광범위한 감독권한만을 가지고 있어 최근 의회의 요구에 대해 "FSAB가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를 원한다"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었다.
금융기관들의 촉구도 잇따르고 있다. 켄 루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회장은 "시가평가 규정 완화를 낙관하고 있다"며 "금융기관에는 실질적으로 안도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로버트 레이놀즈 풋남투자 CEO 역시 시가평가 폐지를 주장해 온 인물로12일에도 시가평가 규제완화를 강하게 촉구했다.
버크셔해서웨이의 워런 버핏은 연례서한에서 시가평가로 인해 비효율적인 시장가격이 형성됐고 이 때문에 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고까지 말했다. 버핏은 동일한 증권인데도 불구하고 버크셔의 자회사마다 가치가 달랐다고 서한에서 밝혔다. 한 자회사에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고 있는 것으로, 다른 자회사에서는 약간의 이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처리됐다고 예를 들기도 했다.
◇ 폐지보다 완화 가능성 `무게`..자산분리·적용 차별화 예상
시가평가 폐지시 발생하는 부작용을 우려해 SEC와 FASB 모두 절대불가를 외쳤지만 규제 완화에는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 자연스럽게 완화 방식으로 관심이 모아진다.
시장에서는 자산의 범위를 분리해 명시하거나 만기까지 가져가는 자산(Hold to Maturity)에 대해서는 시가평가 적용 차별화가 고려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물론 만기보유 증권의 선정이 너무 자의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완화 반대론자들의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다.
이주 초 바니 프랑크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회장은 시가평가 폐지에는 반대하면서도 "만기까지 자산을 보유하는 기관들에 대해서는 예외적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유연성과 신중함이 요구된다"며 "다만, 금융기관들 자체적으로 합리적인 재평가 분석을 내놔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선 칸졸스키 의원도 앞선 은행의 신용손실과 유동성 손실을 구분하는 것이 고려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12일 월스트리트저널(WSJ)도 금융기관들이 유동성 리스크에 따른 손실과 신용리스크로 인한 자산 손실을 분리, 명시하는 것이 SEC나 OCC 모두에 고려 가능한 한가지 대안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