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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안두희를 마주한 선생은 서예를 하던 중이었다. 안두희는 먹을 갈 것처럼 선생 가까이 접근했다. 그리고 권총 네 발을 선생에게 발사했다. 총성을 들은 비서진이 부리나케 서재로 달려갔다. 선생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사망했다.
안두희는 도망하다가 경교장 경비에게 붙잡혔다. 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안두희는 선생이 ‘사회 분열을 조장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이후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징역 15년으로 감형받았다.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선생의 사망으로 동력을 상실했다. 암살 배후에 정치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배후 세력’을 밝히려고 시도가 뒤따랐다.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했다.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히려는 시도는 전쟁통에 좌절했다. 급기야 안두희는 석방돼 복권됐다. 북의 남침에 맞설 군인이 하나라도 아쉬운 형편이었다. 장교로 군에 복귀한 안두희는 전쟁이 끝나고 소령으로 예편했다. 군납 사업을 일으킨 안두희는 부를 쌓았다.
이후 안두희를 향한 테러와 위협이 잇달았다. 그러자 안두희는 말년에 자신의 단독 범행을 부인하고 배후를 언급했다. 진상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결국 1996년 10월23일 버스기사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사망했다. 향년 79세. 박기서씨는 1997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98년 삼일절 특사로 석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