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대의 컬처키워드] K팝그룹 쌍둥이? 현실 모르는 외모 가이드라인

여가부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출연 가수들 쌍둥이?" K팝그룹 폄훼 논란
생존 위해 스타일 노력하는 현실조차 몰라
주관적 표현 문제..문화, 비간섭 원칙 잊었나
  • 등록 2019-02-18 오전 12:05:00

    수정 2019-02-18 오전 6:41:28

K팝 그룹이 참여한 대형 콘서트의 한 장면.(특정 그룹과 관계 없습니다.)
[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여가부 장관은 여자 전두환입니까? 음악방송에 마른 몸매, 하얀 피부, 예쁜 아이돌 동시 출연은 안된답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가 제작·배포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이하 안내서) 논란과 관련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하 최고위원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왜 외모에 대해 여가부 기준으로 단속합니까, 외모에 객관적인 기준이 있습니까, 닮았든 안 닮았든 그건 정부가 평가할 문제가 아니고 국민 주관적 취향의 문제”라며 “진 장관은 여가부가 왜 없어져야 하는지 웅변대회 하는 것 같다”고 적었다.

여가부는 이번 안내서를 과도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점검표를 제시하기 위해 배포했다고 설명했다. 안내서가 공개된 후 일부 네티즌뿐 아니라 일선 방송 제작자들은 어이없어하는 분위기다. 50페이지 분량의 안내서는 권위주의적 단어로 가득하다. 가이드라인이라는 제목의 부록에도 ‘신중을 기합니다’ ‘인식하고’ ‘자제하도록 합니다’ 등 지시만 하는 어투가 많다. 하 의원은 페이스북 글의 끝에 “문 정권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부르는 일부 한국당 의원들과 뭐가 다릅니까? 반독재 투쟁 깃발을 다시 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고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군사독재 시대 때 두발 단속, 스커트 단속과 뭐가 다르냐”는 하 의원에 주장에 이의를 달기도 난감하다.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의 일부
이번 안내서는 지난 12일 여가부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에 등록했다. 이 안내서의 부록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은 제목부터 의아스럽다. 몇몇 사례도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물의 중요도와 외모 사이에 명확한 상관관계를 두는 설정을 자제하도록 합니다’ ‘바람직한 외모 기준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지 않도록 합니다’ 등등이다. 정부 부처가 만든 문서임에도 목적이 정당한지, 수단이 적절한지, 내용이 균형 잡혔는지 등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합니다’라는 문구는 비판 받을만한 대목이다. 외모의 기준 자체가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수 밖에 없다. ‘비슷한’ ‘과도한 비율’ 등 애매한 표현도 한 두 가지 아니어서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높다. 사례로 든 “음악방송 출연가수들은 모두 쌍둥이?”라는 문구는 K팝 그룹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한다는 걸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가부는 “음악방송 출연자들의 외모 획일성은 심각하다”고 적었다. 여가부가 간과한 대목은 음악 방송에 출연하는 K팝 그룹이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음악뿐 아니라 스타일을 다르게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 지다.

안내서의 방향성은 동의한다. 다만 구체적인 사안은 현실이나 문화예술의 특수성과 동떨어져 있다. 성형을 조장하고, 외모를 비하하고, 배금주의를 지향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퇴출해야 마땅하다. 특히 미투 등으로 남녀 성평등을 넘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노력도 더 필요하다. 성 역할 고정관념과 선정적인 용어 사용에 대해 주의하고 ‘처녀작’ ‘처녀비행’ 등 성차별적인 언어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고 방송 프로그램의 출연진의 외모까지 간섭하는 건 과한 게 아닐까 염려된다. 이미 일선 제작자들 역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방송할 때 혹여 특정 성에 대해 오해가 없는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못 맞췄다간 프로그램의 문을 닫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기 “최대한 지원하되 간섭하기 않겠다”며 문화·예술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불과 2년이 지났는데 방송 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이 확대 제시했다. 그 사이 비간섭의 원칙을 잊은 게 아닌가 궁금하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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