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한국측 수석대표 이름에 따라붙는 꼬리말이다. 지난 14개월간 한미 FTA 협상을 이끌면서 국민들에게도 친숙해졌을 정도다.
외무고시 8회로 공직에 입사한 이후 30년 이상 외교통상부에만 몸 담은 정통 관료다.
외모도 범상치 않다. 일본 무사풍의 각진 외모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다.
하지만 김 대표를 직접 만나보면 의외로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에 놀란다. 말투엔 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배어있다. 화법도 놀랄만큼 직설적이다.
요리조리 피해가는 외교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김 대표는 "협상의 첫째 기술은 상대방과 진솔한 대화 속에 신뢰를 쌓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한미 FTA 협상 파트너였던 웬디 커틀러 미국측 수석대표와 아예 친구가 됐다. 김 대표는 "지난 2일 협상이 끝난 이후에도 웬디와 사흘에 한번 꼴로 전화 통화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성격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터뷰 당시 김 대표는 "꼭 써 주이소(달라)"라는 부분과 "이런 거는 쓰지 마라"는 부분을 강하게 어필했다.
김 대표는 "8차 협상에 나가기 전 국회 보고를 했더니 어떤 국회의원이 청문회 갈 용의가 있냐고 몰아세우더라"며 "밤새워 협상하는 사람을 세워 놓고 의혹이 있는 것처럼 몰아세우는 게 맞는 것인지 정말 의구심이 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협상 분과장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니깐 굉장히 의기소침해졌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이 외에도 지난해말 대외비인 무역구제와 관련한 전략문건이 유출됐을 때와 협상문을 공개하라는 국회 요구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좌우명을 물어봤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자"라고 말한다.
취미도 남들이 잘 안하는 패러글라이딩이나 카이트 보딩과 이색적인 것들이다. 패러글라이딩은 98년 제네바 공사를 지낼 때 배웠다. 나이 50줄이 들어설 무렵이다. 한번 뜨면 3~4시간씩 공중에서 체류할 수 있는 수준급 실력을 갖췄다는 후문.
협상 당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을 물었더니 협상이 타결된 순간을 이야기했다.
"협상이 타결된 후엔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냥 됐구나 싶었다. 협상장인 하얏트 호텔 2층 회의실에서 본부장과 담배를 하나 맛있게 피웠다"
김 대표는 "당시 본부장과는 말이 없었다"며 "다만 눈물이 나오더라"고 담담하게 회상했다.
협상이 끝난 후 오히려 `보람`을 찾는 눈치. 그러면서 지난 7일 친구 몇명과 서울 아차산에 올랐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산행을 마치고 자양동 버스 터미널 허름한 삽겹살 집에 들러 소주를 마시는 데 어떤 분이 소주병을 들고 오더라. 소주 한잔을 받아마셨는 데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줄이어 술이랑 안주를 직접 건네주더라"
김 대표는 "소주를 건네주는 손이 거칠고 무뎌, 하이칼라는 아닌 것 같았다"며 "열심히 잘 해줘서 고맙다고 말 해주니 가슴이 찡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당시 그의 목은 쉬어있었다. 중간중간 가래도 나왔다. 두 눈은 충열돼 있었고 한쪽 눈은 부어있었다.
김 대표의 비서는 "협상을 마친 후에도 매일 7시30분 경 출근, 밤 12시에 퇴근한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도 "평소 운동을 철저히 해서 버티는 것"이라며 "말 그대로 강철 체력"이라고 설명했다.
김종훈 대표 약력
▲1952년 대구 출생
▲1975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74년 외무고시 8회 합격
▲1974년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1993년 주미 대사관 경제참사관
▲1998년 주제네바 공사
▲2000년 외교부 지역통상국 국장
▲2002년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2004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고위관리회의 의장
▲2006년∼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