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일부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인식됐던 장르 소설이 서점가 이끄는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순수문학 위주의 기성 문학이 서점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반면 판타지, 공상과학(SF) 등 장르 소설이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을 휩쓰는 중이다.
1~2년 전부터 천천히 저변을 확대해 온 장르소설이 어엿한 주류 문학의 하나가 됐다는 것이 관련업계의 분석이다. 예스24 관계자는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들도 많고 이에 대해 독자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며 “최근에는 장르소설이라도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렵지 않게 풀어내기도 하고, 독자 입장에서도 소설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장르 소설의 인기를 이끄는 대표 주자는 20세기 영미 SF계의 거장 프랭크 허버트가 쓴 ‘듄’(황금가지)이다. 16일 기준 ‘듄’은 주요 서점가 베스트셀러 소설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책은 사막 행성인 ‘아라키스’를 배경으로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황제와 하코넨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했다가 복권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총 1000쪽에 이르는 장대한 분량으로 1963년 미국에서 첫 출간됐다. 책은 미국에서 1965년 제정된 네뷸러 상의 첫 수상작으로 선정됐고, 다음해 휴고 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유난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1년 번역 출간됐으나 2000부가량의 1쇄도 다 팔지 못했다. 당시에 SF소설이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때문이다. 최근의 인기는 동명의 영화가 흥행몰이를 하면서 시작됐다. 총 6권인 ‘듄’시리즈는 16일까지 3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책을 출간한 황금가지 관계자는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 책이 찍는대로 팔리는 수준”이라며 “1950~60년대 출간된 클래식 SF소설이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건 ‘반지의 제왕’ 이후 20여년 만이다”고 놀라워했다. 그는 “영화의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최근 들어 국내에서 SF소설에 대한 진입 장벽이 낮아진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초엽 작가도 연달아 SF 장르의 소설책을 출간하며 서점가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으로 한국 SF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다. 지난 8월 출간한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를 시작으로, 지난달과 이달 초 각각 출간한 단편집 ‘방금 떠나온 세계’(한겨레출판), ‘행성어 서점’(마음산책)을 출간했다. 현재 모두 주요 서점가 베스트셀러 소설분야 상위권에 올라가 있다. 한 작가의 책이 짧은 시간 내에 동시에 출간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모든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점에서 김 작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장은수 출판 평론가는 “최근 10년 사이 과학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지면서 미래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며 “김초엽 작품은 SF형식으로 이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독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50만부 이상 팔린 이미예 작가의 판타지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팩토리나인)도 장르 소설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책은 1년 넘게 꾸준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기에 힘입어 올해 출간된 후속편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역시 나란히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장르 소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에서 신인 작가의 책이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놀라울 수밖에 없다”며 “다양한 문학이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