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과 탐욕으로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던 인물은 원균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의 장계(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벼슬이 없는 말단군인으로 전쟁에 참전) 신세가 됐다. 이순신 장군의 자리였던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의 차지였다.
원균은 칠천량해전에 앞서 무리한 항해와 적의 기습으로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을 상당수 잃었다. 이에 도원수 권율 장군은 직접 출정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원균을 경남 사천으로 연행해 곤장을 때렸다. 원균에게 직접 출정할 것도 지시했다.
결국 원균은 전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왔다. 그러나 대결을 회피하며 약 올리는 일본 수군에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왜군을 무리하게 쫓은 탓에 노를 젓는 노군들은 탈진해 쓰러졌으며 물을 싣고자 이동한 부산 가덕도에서는 기습공격을 당하자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급기야 원균은 주력 함대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동시킨 뒤 불살랐으며 지상으로 도주해 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힘들여 쌓아놓은 판옥선을 교전 없이 완전히 없앤 것이다. 이때 항전하겠다며 전선을 이탈한 판옥선 12척만이 후일 이순신 장군이 승리로 이끈 명량대첩에 쓰였다.
칠천량해전 후 원균은 자취를 감췄다. 조선 조정의 공식 입장은 왜군에 의한 전사였으나 도망 다니는 원균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원균이 언덕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몸이 비대해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고 죽음을 모면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러나 전란 후 원균은 이순신·권율 장군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추증됐으며 매년 음력 7월 15일 그의 제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를 두고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명성이 널리 퍼진 이순신과 권율을 견제하기 위해 왕권 강화 목적으로 원균을 같은 반열에 올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원균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75호로 현재 경기도 평택에 있다. 하지만 그의 행방이 묘연한 만큼 시신이 없는 가묘에 불과하다. 실제 원균의 시신은 경남 통영에 있는 엉규이 무덤에 매장됐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들은 엉규이가 원균의 지역 발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엉규이 무덤은 별도의 안내문이나 이정표 없이 잡초에 덮여 방치돼 있다. 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 관계,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장본인이라는 낙인 때문인지 후손들조차 외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