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나은경 기자] 비만·당뇨치료제가 노화억제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다. 비만이 단순히 살을 찌게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만성질환의 원인으로 노화를 가속화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지면서다.
대표적인 비만치료제 개발사인 덴마크의 노보 노디스크와 미국 일라이 릴리는 지난 1년간 주가가 각각 80%, 94% 상승했다. 국내에서도 비만치료제를 개발한다는 소식이 나올 때마다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큰 폭으로 꿈틀댄다. 아직 구체적인 임상 데이터가 나오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기반의 비만치료제가 시장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건 비만과 당뇨 외 다양한 질환에도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어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비만약 시장, GLP-1 중심 재편
지난 6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미국당뇨학회(ADA)에 다녀왔다는 국내 바이오벤처의 한 임원은 “매년 ADA를 챙겨왔는데 최근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귀띔했다. 과거에는 GLP-1이 다양한 비만·당뇨치료제의 한 줄기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전부 GLP-1을 중심으로 어떻게 더 약효나 안정성이 개선된 약을 만들까 논의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는 GLP-1과 인슐린을 같이 썼을 때, GLP-1과 DPP-4 억제제를 같이 썼을 때 등 기본적으로 GLP-1 제재는 전제로 깔고 시작하는 분위기가 됐다”며 “비만·당뇨치료제 분야에서는 세계관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수준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다.
GLP-1은 소장 내 L세포가 식후 분비하는 호르몬이다. 식욕을 낮추고 위장관 운동은 저하시켜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주 역할이다. 혈당을 높이는 글루카곤(GCG) 분비를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
사실 GLP-1 기반의 당뇨치료제가 처음 승인된 것은 지난 2005년으로 꽤 오래전 일이다. 당시 일라이 릴리는 독도마뱀 힐라 몬스터의 타액에 들어있는 호르몬 엑센딘-4를 이용한 ‘바이에타’(성분명 엑세나타이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바이에타는 지금보다 부작용이 크고 1일2회 투여로 편의성이 떨어져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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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시선이 달라진 것은 바이에타보다 편의성과 부작용을 개선한 리라글루타이드 성분의 ‘빅토자’가 등장하면서다. 당뇨치료제로 10년이상 쓰이던 빅토자가 체중감소 효과는 물론 혈당 및 고혈압, 콜레스테롤 수치 개선에도 효능을 보인다는 것이 확인되자 노보 노디스크는 이를 ‘삭센다’라는 이름의 비만치료제로 개발했다. 노보 노디스크가 삭센다에 이어 세마글루타이드 성분의 ‘위고비’(당뇨치료제명 ‘오젬픽’)까지 연속 홈런을 터뜨리자 다른 글로벌 빅파마들도 본격적으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현재 GLP-1 성분의 비만치료제 시장은 세마글루타이드 성분의 위고비와 티르제파타이드 성분의 ‘마운자로’로 양분돼 있다. 위고비보다 뒤늦게 개발된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는 그보다 체중감량 효과가 더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위고비가 GLP-1 유사체로만 작용하는 것과 달리, 마운자로는 GLP-1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장 호르몬인 위산분비 억제 폴리펩타이드(GIP) 유사체로도 작용하는 이중작용제다.
물론 아직 한계도 있다. 펩타이드 제재의 한계 탓에 기존 피하주사(SC) 제형과 유사한 효능을 가진 먹는 약(경구약)을 개발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다른 비만치료제에 비해 적긴 하지만 그래도 오심, 구토, 위장장애, 근육 감소와 같은 부작용이 보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비만치료제 붐이 불면서 국내 제약·바이오 회사들은 GLP-1과 관련된 약들의 개발 우선순위를 끌어올리고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와 일라이 릴리에 비하면 후속주자일 수밖에 없는 국내외 기업들은 기존 약의 한계를 극복하거나, 유전적 요인 등 희귀 원인으로 비만이 되는 일부 환자를 집중 타깃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을 찾아 비만치료제 개발에 몰두하는 중이다.
GLP-1·GLP-2 수용체 작용제로 비만치료제 임상 2상을 진행 중인 프로젠의 김종균 대표이사는 “개발 중인 자사 대사 이상 관련 지방간염(MASH) 신약후보물질이 비만·당뇨치료제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한 지난 2022년부터 회사의 주요 파이프라인으로 우선순위를 높였다”며 “지난해 하반기 이후 회사의 자원 50% 이상을 투입해왔고 올해는 비중을 70% 넘게 투입 중”이라고 설명했다.
韓도 GLP-1 이중·삼중작용제 개발 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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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관심에 힘입어 한국 증시에도 ‘비만’을 테마로 한 3개의 상장지수펀드(ETF)가 상장됐다. 삼성증권의 ‘KODEX 글로벌비만치료제 톱2플러스’와 미래에셋증권의 ‘TIGER 글로벌비만치료제 톱2플러스’, KB증권의 ‘KBSTAR 글로벌비만산업톱2+’다. 이 세 ETF는 상장한 지 네 달 만에 2300억원의 투자금이 몰리는 등 비만치료제는 얼어붙은 한국 증시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한미약품(128940), 유한양행(000100), 디앤디파마텍(347850), 프로젠, 일동제약(249420) 등이 새로운 비만치료제 개발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GLP-1과 글루카곤을 동시 타깃하거나(디앤디파마텍), GLP-1과 GLP-2를 타깃하는 방식(프로젠)으로 새로운 기전을 기반으로 한 GLP-1 이중·삼중작용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당장 공식적으로 구체적인 개발계획을 밝히지 않은 제약사들도 내부적으로는 GLP-1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기전의 비만·당뇨치료제 개발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상용화된 약의 성분을 기반으로 장기지속형 주사제를 만들거나 경구약, 마이크로니들 패치제와 같은 개량신약을 만드는 기업들도 있다. 인벤티지랩(389470)은 1개월용 장기지속형 주사제와 경구약 개발을 진행 중이고, 디엑스앤브이엑스(DXVX(180400))도 경구약 개발 초기 단계에 있다. 라파스(214260)는 대원제약(003220)과 손잡고 마이크로니들 패치제를 만드는 중이다.
대원제약 관계자는 “과거에 비만치료제는 단순히 식욕억제 효과만이 밝혀졌었지만 최근에는 국내외 제약사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 수면무호흡, 심부전, 근육 유지, 뇌 신경질환 등으로 적응증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며 “비만치료제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제약·바이오산업의 ‘테마주’로 반짝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 시장은 지속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