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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은 1989년 서울 돈암동의 한 가정집에서 3000여만 원의 금품을 빼앗고 집주인을 흉기로 살해(강도살인치사죄)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서 청송교도소를 거쳐 부산교도소에서 수감중이었다.
신창원은 노역 작업 중 몰래 입수한 15cm가량의 실톱날 조각을 신발 밑창에 숨겨 빼돌렸다. 이 작은 조각으로 지름 1.5cm 통풍구 쇠창살을 잘랐다. 교정본부에서 매일 교화방송을 송출하는 틈을 타 하루 20분씩 두 달간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풍구를 통해 빠져나온 신창원은 교도소 안에 있던 교회 공사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환풍구에서 잘라낸 쇠창살로 공사장 가림막 아래 땅을 파내 기어나갔다. 이후 공사장과 감시초소 사이에 설치된 임시출입문 지지대와 담장 사이를 인근에 있던 쇠파이프 밧줄을 이용해 넘은 뒤 새벽 4시 30분쯤 교도소 외곽 철조망을 뛰어넘어 탈주했다.
신창원이 당시 철통 보안을 자랑하던 부산교도소를 탈출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 30여 분 남짓이었다.
그 뒤 신창원은 2년 6개월간(907일) 전국 4만여km를 누비며 도피행각을 이어 나갔다. 빈집 털이 등 새로운 범죄로 9억 8000만원에 달하는 도피자금을 마련했다.
신창원의 장기 도피행각은 갖가지 기록을 남겼다. 그를 검거하기 위해 동원된 경찰 인력만 97만여 명에 달했다. 신창원을 놓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57명의 경찰관이 파면, 해임, 전보 등 징계를 당했다. 뿌려진 수배 전단은 463만 장이며, 경찰에 접수된 신고도 5823건이었다. 경찰은 1081만여 업소를 탐문했고, 은신 용의처 1004만여 개소를 뒤졌다.
신창원은 매우 민첩했고 운동신경도 굉장히 뛰어났다. 도주 당시 코앞에서 마주친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친 것만 여섯 차례나 됐다. 가스총을 맞고 쇠파이프에 팔이 부러지는 상황에서도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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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생인 신창원은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76년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중학교 2학년 때 중퇴했다. 14살 때인 1982년부터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도둑질로 잡혔다가 경찰관들이 훈방 조치한 신창원을 아버지가 다시 끌고 가 소년원에 넣어달라고 사정해 수감되기도 했다.
신창원은 자신의 저서에 범죄의 길로 빠지게 된 계기를 적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당시 선생님으로부터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는 말을 듣고 마음속 악마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의 폭행과 계모의 존재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신창원은 재복역 이후 두 차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으나 실패했고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