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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역전했다. 백선엽의 1사단은 10월19일 평양을 점령했다. 1951년 1군단장에 임명된 그의 부대는 동부전선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합작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후 북한 빨치산 토벌에서도 공을 세웠다.
전공을 인정받은 그는 1952년 중장으로, 1953년 1월 대장으로 각각 진급했다. 국군 사상 처음으로 4성 장군에 오를 당시 그의 나이는 만 33세에 불과했다. 휴전 이후 줄곧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전쟁 전후로 육군참모총장을 각각 지냈고, 1959년 합동참모의장에 선임됐다. 현역 군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이다.
그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각별한 인연이다. 1949년 남로당 활동 전력으로 총살 위기에 처한 박정희 당시 소령을 구명한 게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있던 백선엽 대령이었다. 군사정권 초기 견제를 당했지만, 이후 국무위원과 요직을 거친 건 이런 인연에서 비롯한 측면이 있다.
하필 그가 배치된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항일 세력을 토벌하는 부대였다. 우리 독립군도 토벌 대상에 포함됐다. 그는 자서전에서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다. 이런 이유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일각에서는 그의 전공이 부풀려졌거나 사실과 다르게 미화됐다고 주장한다. 이밖에 공직을 거치면서 이룬 축재와 이를 통한 부동산 투기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2020년 7월10일, 그가 숙환으로 별세하자 현충원 안장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친일행적이 다시 발목을 잡은 것이다. 논란을 뒤로하고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다. 10일 현재 현충원에서 백선엽을 검색하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비고가 붙어 있다. 국가보훈부는 이 문구를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