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연기금과 공제회 등으로부터 출자받기 위해 연초부터 준비에 여념 없는 한 운용사 본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글로벌 경기 둔화와 금리 인상 등으로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자산운용사들도 투자받는 데 애를 먹었다. 이 와중에 몇 안 되는 출자 콘테스트(연기금과 공제회 위탁운용사 선정)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기 위해선 이른바 ‘연봉 후려치기’를 필승 전략으로 내세운다며 합격 비법을 귀띔해줬다.
투자 업계에서는 이미 뿌리 깊은 관행 중 하나다. 하지만 기관투자가들 입장에선 운용사들에 적은 보수를 주면 그만큼 수익이 많이 남기 때문에 ‘운용보수’가 지원자들의 과거 운용 성과만큼 매력적인 포인트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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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행정공제회는 오는 20일까지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 위탁운용사를 모집한 이후 정량평가 평점과 정성평가를 각 50%씩 합산해 1곳을 선정할 계획이다. CLO는 은행이 기업에 대출한 채권을 담보로 발행하는 자산유동화증권(ABS)의 일종이다. 지난해 말 기준 CLO 운용자산 1000억원 이상이며, 국내 기관을 대상으로 CLO 펀드 설정 경험이 있는 운용사 등만 지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는 20일까지 해외채권 위탁운용사 2곳을 모집하는 우정사업본부 우체국예금도 평가기준에 ‘수수료 수준’ 비중을 10%로 뒀다. 공무원연금도 올해 해외 간접채권 신규 위탁운용사를 선정할 당시 정량평가 항목 중 운용보수를 10% 비중으로 평가했다.
이처럼 기관투자가 다수가 지원서를 받을 때 운용사로부터 직접 받고 싶은 만큼 ‘임금’을 먼저 제안하게 하지만, 오디션 지원자 입장에선 당연히 부담스러운 구조라고 토로한다. 특히 중소형 운용사일수록 자금 유치 사정이 녹록지 않아 더더욱 운용보수를 낮게 잡아 쓸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일단 뽑히는 게 중요해서 낮은 bp(1bp=0.01%)를 적어내지만, 최종 선정되면 사실상 그 이하로 받아 자원봉사 수준”이라면서도 “신생 운용사는 AUM(운용자산)을 늘리고, 앞으로 더 많은 기관으로부터 투자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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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제회 관계자는 “출자 콘테스트에서 뽑히는 운용사들은 수수료를 적게 가져가지만, 경험과 기록을 얻는다”며 “운용보수를 정량평가 항목에 넣는 것도 법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진 절차인데 대체로 과도하지 않은 수준으로 책정해 제안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일부 기관의 빡빡한 평가 방법에 혀를 내두르며 지원 자체를 포기한 운용사도 있었다. 한 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펀드를 운용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적은 수수료를 받으며 회의감이 들었다”며 “다른 운용사들과 눈치싸움 끝에 적은 보수를 써서 겨우 뽑혔는데, 함께 선정된 다른 대형 운용사는 몇 배 높은 보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어 힘이 빠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운용 보수의 하한선을 정해놓거나 전체적인 평가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운용사는 기관들로부터 위탁을 못 받으면 리스크가 큰데, 대부분 기관의 수수료는 너무 낮다”며 “중소형 운용사들이 일단 AUM을 늘리는 게 목표인 건 맞지만, 그들이 선정된 이후에 자산 리스크 관리까지 책임감을 느끼고 더 잘할 수 있게 기관들이 조금 더 높은 보수를 주며 북돋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