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연호 기자]1999년 7월 16일 오후 5시 20분께, 전남 순천시 조례동의 한 아파트에서 신창원이 검거됐다. 이로써 908일 만에 그의 파란만장했던 도주극이 끝난 셈이었는데, 그는 이 기간 여러모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 지난 1999년 7월 16일 전남 순천에서 검거된 신창원이 부산으로 압송되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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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에 대한 들뜬 기대감과 새 천년이 오기 전 세상이 망할 거라는 종말론이 혼재하며 어수선하던 1999년의 한여름, 절대 잡힐 것 같지 않던 신출귀몰의 대명사 신창원이 잡혔단 소식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희대의 탈옥수’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신창원의 탈주극은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는 1989년 서울 돈암동의 한 가정집에서 3000여만 원의 금품을 빼앗고 집주인을 흉기로 살해(강도살인치사죄)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수감됐다.
서울구치소와 청송교도소를 거쳐 부산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신창원은 투옥된 지 약 8년 만인 1997년 1월 탈출을 감행했다. 신창원은 노역 작업 중 몰래 입수한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하루 20분씩 감방 화장실 쇠창살을 조금씩 잘랐다. 톱질 시 발생하는 소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매일 법무부 교정본부의 라디오 교화 방송 송출 시간에 맞춰 화장실에 들어가 20분 간 톱질을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2개월의 톱질로 지름 1.5cm의 쇠창살 2개를 끊는데 성공한 신창원은 그 틈으로 감방을 빠져나가 외벽 환기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좁은 공간을 빠져나가기 위해 신창원은 변비에 걸렸다는 핑계로 식사량을 줄여 3개월 동안 체중 15kg을 감량했다.
1층에 내려가 쇠창살로 교도소 내 교회 신축 공사장 철담장 밑의 언 땅을 파내 공사장 부지로 진입했고, 공사장에서 주운 밧줄을 타고 외부로 통하는 공사장 벽을 넘어 교도소를 완전히 빠져나갔다. 당시 철통 보안을 자랑하던 부산교도소를 탈출하는 데 불과 1시간 30여 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뒤 그는 2년 6개월 간 전국 4만여km의 거리를 이동하며 도주를 지속했다. 도피 자금은 절도 등의 새로운 범죄를 통해 마련했다.
그는 매우 민첩했고 운동신경도 굉장히 뛰어나 도주 당시 코앞에서 마주친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친 것만 십여 차례나 됐다. 가스총을 맞고 쇠파이프에 팔이 부러지는 상황에서도 잡히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낱 탈옥수 신창원 한 명을 잡기 위해 동원된 경찰만 연인원 약 100만 명에 달했다. 그는 경찰들 사이에서 ‘신출경몰’이라는 말까지 유행시켰는데, 이 말의 뜻은 ‘신창원이 출몰하면 경찰이 몰락한다’는 의미였다. 실제 그의 신출귀몰한 도주 행각 탓에 그를 눈앞에서 놓친 책임을 지고 징계 받은 경찰관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그가 대대적인 경찰력마저 무력화하며 도주를 장기간 이어 가자 현상금은 5000만 원까지 올라갔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고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별의별 에피소드들이 매일 같이 쏟아져 나왔다. 잠복 근무 중이던 형사가 신창원의 동거녀를 성폭행해 파면되고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9년 7월 16일 가스 수리공 김모 씨가 신창원의 집으로 수리를 하러 가게 됐고, 신창원임을 확인한 김 씨의 신고로 신창원은 결국 검거됐다.
검거 당시 화려한 패션이 화제가 되는 등 ‘신창원 신드롬’까지 일어났고 인터넷엔 팬카페까지 개설되기도 했다. 그는 탈옥 이후 범죄에 대해 징역 22년 6개월을 추가로 선고 받았다.
신창원은 재복역 이후 두 차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으나 실패했고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