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자본시장 참여자들에게 ‘내년은 다를 것이다’는 덕담을 건네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본시장 안팎에서는 일찌감치 올해를 ‘최악의 한 해’로 평가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게 중론이다. 긍정보다 의심에 익숙한 시장 특성도 있지만, 최근 10~20년 새 이렇게 어려웠던 시기가 있나 싶었다는 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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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분위기는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어쩌면 흐름이 이어지는 것을 넘어 올해보다 더 척박하고 우울한 시장이 전개될 수도 있다. 자본시장 관계자들이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도 어쩌면 가늠이 안 되는 내년 시장 전망 때문이다.
지난해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상상조차 못했다. 2021년 한 해 국내에서 이뤄진 M&A(인수합병) 거래규모가 6년 만에 50조원을 넘어서며 탄력을 받았다. 넘치는 유동성에 자신감을 더한 투자가 시장에 쏟아졌다. 올해 1조원 넘는 초대형 블라인드 펀드(투자 대상을 정하지 않고 목표수익률만 제시한 뒤 투자금을 모으는 펀드)를 만들겠다는 사모펀드 운용사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시장 주요 변수였던 코로나19는 저 멀리 연을 띄워 보낸 듯 했다. 그런데 올해 예기치 못한 시장이 펼쳐지면서 일 년 만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시장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원자재 수급 악화와 가격 상승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전쟁도 없었고 각종 원자재들이 무리 없이 유통됐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작금의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초강력 ‘퍼펙트 스톰’을 몰고 온 장본인은 기준 금리다. ‘원금에 대한 이자율 기준’을 뜻하는 이 네 글자의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14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인상하면서 기준금리를 4.25~4.50%로 올렸다. ‘치솟는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7차례 연속으로 올린 결과 2007년 이후 15년 만에 최고 수준이 됐다. 오죽 올랐으면 0.50% 금리 인상 결정을 두고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고 안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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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아니라 하겠지만, 국내 기준 금리는 미국의 기준 금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양국 간 기준 금리 격차가 벌어지면 국제 무역이나 교역 등에서 빚어질 우려가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한·미 모두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고 치솟은 물가를 단속해야 한다’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준이 기준 금리를 또 올린 상황에서 현재 3.25%인 국내 기준금리는 연초에 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무난하게 3.50%를 찍을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제로금리가 언제였나’를 곱씹어볼 겨를도 없이 껑충 뛴 금리를 보면서 시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남의 돈을 모아 투자해서 수익을 내야 하는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치러야 할 차입금 이자는 일년 만에 ‘두 배’가 됐다. 자본시장에 따르면 연초 연 4% 수준이던 인수금융 조달 금리는 최근 연 8~9%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자가 두 배가 되면 수익은 줄고 부담은 늘 수밖에 없다.
PEF 운용사에 뭉칫돈을 떡하니 건네던 공제회나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시장 분위기가 변했는데, 자칫 거금을 투자했다가 낭패를 보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가파른 금리 인상에 정서적인 부분까지 변하는 순간이다. 돈을 빌릴 데가 줄면서 조 단위 펀드를 만들겠다던 PEF 운용사들도 자취를 감췄다.
더 큰 문제는 보유 중인 투자처를 시장에 팔아야 하는 PEF 운용사들이다. 실적을 끌어올려 넉넉한 가격에 팔자는 계획이 있었을 텐데 급제동이 걸렸다. 매각 타이밍을 놓치면 ‘시간을 더 달라’며 투자자들에게 차입한 자금 연장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런 상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돌아오는 것은 두 배 혹은 그보다 훌쩍 넘게 붙은 차입금 이자일 것이다.
사방이 위기인 상황에서 ‘과감한 베팅’ 따위는 남의 얘기다.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생존의 기로에 직면했다면 보수적 기조를 세울 수밖에 없다. 과감한 투자나 M&A가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이유다. M&A 시장에 국한해 언급하고 있지만, 거대 차입금으로 지탱하고 있는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나 주택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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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건조하게 시장을 바라보자. 기준 금리 향방은 아무도 모른다. 더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다. 다만 문제의 본질이 ‘더 오를 것이냐, 내릴 것이냐’가 이제는 아니라는 점에 관심을 둬야 한다.
이미 금리가 너무 올라 부담감이 차오를 대로 차오른 상황에서 언젠가 내리는 것 아니냐는 생각은 너무 순진하다. 금리 동결만 해도 ‘이제 금리가 오르지 않는다’며 환호할 게 점쳐지는 상황에서 1년 전 수준의 기준 금리 회귀를 논하기엔 한참이나 앞서 간 ‘희망회로’다.
설령 금리 인하 구간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앞선 상승분을 모조리 반납할 정도의 과감한 금리 인하가 일어날 것이냐의 대답도 회의적이다. 이례적이었던 자이언트 스텝보다 더 파격적인 자이언트 ‘백’스텝이 일어나야만 지금의 부담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8~9%대 이자가 반 토막이 나려면 자이언트 ‘백’스텝을 몇 번이고 넘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어쩌면 현재 상황이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 현실적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전쟁이 막을 내리고 모든 원자재 수급이 원활해지면서 인플레이션 국면이 잠잠해진다면 금리는 결국 내릴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경제 공황이 찾아온다면 중앙은행은 돈을 풀 수밖에 없고 금리를 인하할 것이다. 문제는 현 시점에서 그 시기가 내년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내년에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현상 유지에 집중하는 한 해를 보낼 가능성이 크다.
내년 시장 전망을 묻는 말에 한 자본시장 관계자의 짧은 답변으로 끝을 맺으려 한다. “이렇게 좋지 않나 싶었던 시기가 있었나 싶네요, 안 좋았다가 반등하는 게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번에는 좀 다를 것 같아요. 내년에는 놀고 싶어서 노는 게 아니라 강제로 놀아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