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백범 김구 선생은 1946년 6월29일 암살당했다.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선생에게 권총을 당겨 살해했다. 안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개월 만에 징역 15년 형으로 감형된다.
| 김구(왼쪽) 선생과 안두희.(사진=연합뉴스) |
|
복역하던 와중인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안씨는 석방돼 장교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전투 중에 부상한 그는 1953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휴전 이후 이어진 혼란기를 틈타 부를 손에 쥐었다. 포병 시절 연을 쌓은 장교들을 통해 군납 사업을 벌여 크게 일으킨 것이다.
1960년 4월19일 혁명이 일어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사업을 접고 도망하다가 1961년 4월 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에 잡혀 검찰에 넘겨졌다.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들어 안씨를 처벌하지 않았다. 국민 여론이 들끓었다. 이후 안씨는 잠행하고 신분을 숨기고 살아갔다.
안씨에게 첫 사적 제재가 가해진 때는 1965년 12월이다. 강원 양구군에서 29세 청년 곽태영씨로부터 신체 주요 부위가 칼에 찔리는 피습을 당했으나 구사일생했다.
그에게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난 건 1987년 3월이다. 서울 마포구청에서 백범기념사업회 소속 권중희씨가 휘두른 각목에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 사건일 발생 직후 또 다른 시민이 안씨의 집으로 찾아가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다. 그해 7월 회사원 노모씨로부터 각목 테러를 당했다.
안씨는 테러 위협을 피해 아예 한국을 뜨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1974년 미국 이민 시도는 여권이 나오지 않아 불발했다. 먼저 도미한 장남의 가족 자격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고 비난 여론이 일자 정부에서 여권을 내어주지 않았다. 1981년 이민 여권을 발급받았지만, 미국에서 비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 박기서씨가 2018년 10월24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안두희를 살해하는 데 쓴 ‘정의봉’을 기증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
안씨는 1991년 중풍을 맞고 거동이 불편해졌다. 휴전 이후부터 사십여 년을 도망하는 신세로 살았으나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안씨는 말년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는 말을 뒤집고 배후를 언급했다. 1992년 4월 동아일보와 문화방송 인터뷰에서 암살의 배후로 김창룡, 김태선, 최운하, 노덕술, 장택상 등 5명을 언급했다. 그해 2월 주변 권유로 김구 선생 묘소에 참배한 이후 입을 연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서 꾸린 김구 시해 진상규명 청문회에서는 증언을 거부했다.
1996년 10월23일 생을 마감했다. 버스를 운전하던 시민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살해당했다. 박씨는 범행 직후 경찰에 자수하면서 “정의는 살아 있다”고 외쳤다. 대법원은 1997년 11월 “살해는 어떤 수단이나 목적이든 정당화할 수 없다”며 징역 3년을 확정했다. 살인죄의 최저 형량(5년 이상)보다 낮았다. 박씨는 1998년 3·1절 특사로 사면돼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