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88년 10월2일 서울올림픽이 폐막했다. 16일간 벌어진 열전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이 순위는 지금까지 한국이 올림픽에서 거둔 순위 가운데 최고로서 깨지지 않고 있다.
|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사진=IOC) |
|
한국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스포츠 강국이라는 칭호에 그치지 않았다. 냉전 시대 희생양에서 냉전 시대를 종식한 주역이라는 평가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전까지 올림픽은 이념의 진영논리가 참가를 좌우했다.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이, 미국 로스앤젤러스 올림픽(1984년)은 소련을 포함한 공산 진영이 각각 보이콧한 반쪽짜리로 치렀다.
서울올림픽은 미소를 비롯한 동서구권이 고르게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밴드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서울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치러진 단면을 보여준다. 서로 손에 손잡고 반목을 멈추고 화합해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이루자는 희망을 전 세계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방해는 집요했다. 1987년 터진 KAL(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대표적이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탑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국적기를 폭파한 사건이었다. 사건으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대선을 앞두고 거센 북풍이 불었는데, 자연스레 서울올림픽에 대한 테러 우려도 커졌다. 북한은 선전전을 통해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부추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울올림픽에 불참한 IOC 회원국은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7개국밖에 되지 않았다. 공산권을 상징하는 소련과 동독마저도 선수단을 서울올림픽행 비행기에 태웠다.
서울올림픽이 북한에 눈엣가시였던 이유는 체제의 열위 탓이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최빈국으로 전락했는데, 같은 위치에서 출발한 남북은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경제 노선으로 택하고 경쟁했다. 한때 북한이 남한을 원조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 세계적으로 드러났다.
마스코트 호돌이도 큰 사랑을 받았다. 디자이너 김현씨가 그려서 국민 공모를 거쳐 탄생했다. 한국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에 무엇을 한국의 상징으로 입힐지가 관건이었다. 상모가 안성맞춤이었다. 호돌이가 쓴 상모에 달린 물채는 알파벳 ‘S’ 자를 하고 있는데, 올림픽의 역동성과 서울(Seoul)을 나타낸다. 미국 식품사 켈로그사가 자기들 캐릭터 ‘토니 주니어’를 베꼈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내수 경기는 불같이 일어났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과 올림픽을 즐기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요식업, 관광업, 숙박업 등이 활기를 띠었다. 서울지하철이 4호선까지 깔리면서 활동반경도 확장했다.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으로 소비력이 커졌다. 올림픽을 계기로 진출한 외국 브랜드가 한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도 됐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서울올림픽까지 경기장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시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판잣집은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부랑자와 노숙인 등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국가폭력 사건으로 규정된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가 커진 데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자유롭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