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도쿄에서 한 노숙인이 짐을 들고 길을 건너고 있다(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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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지난 9일 일본 도쿄역. 90세 정도로 돼 보이는 할머니가 손주뻘인 40대 남성에게 다가가 묻는다. “민망하게도 제가 돈이 없어요.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가 고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먹밥과 물 살 돈 좀 빌려주시겠어요?” 쭈글쭈글한 손으로 전 재산이라며 주머니에서 몇십엔을 꺼내 보여주는 할머니. “갚지 않아도 된다”며 1000엔짜리 한 장을 쥐여주자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혹시 사기당한 건 아닐까 의심한 남성은 이내 편의점에서 나온 할머니 손에 들린 주먹밥을 보고 먹먹해진다.
25일 일본 출판사 고단샤가 발행하는 주간지 프라이데이는 지난 4월 3차 긴급사태 선언 이후 구걸하는 노숙인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에선 15년 전 정도부터 자취를 감춘 길거리 구걸이 다시 등장한 건 무슨 이유일까.
| 도쿄 길거리에 마스크 없이 누워 있는 한 노숙인(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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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에서 알루미늄 캔을 주워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70대 노숙인은 최근 플라스틱 깡통 하나를 놓고 행인들에게 구걸을 시작했다. 깡통 1kg에 100엔 정도를 받으며 생활했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고물상이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깡통을 모으는 일도 어려워져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100엔도 못 벌 때가 부지기수였다고. 그는 “지금까지 이런 짓은 안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일이 전혀 없다”고 푸념했다.
코로나가 가장 먼저 앗아간 건 노숙자들의 생계형 일자리다. 일본의 노인 빈곤 문제를 지적한 <하류노인> 저자 후지타 다카노리는 “코로나로 전단지 배포와 줄서기 대행 등의 일을 하던 노숙인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 지난달 일본 황금연휴 기간 불 꺼진 신주쿠역 앞 광장에서 한 노숙인이 바닥에 누워 있다(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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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도 없는데 나빠진 치안 역시 노숙자들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다. 방역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며 길거리에 회사원이나 학생, 관광객이 줄어든 대신 불량배가 늘었다는 것이다. 실제 노숙자들이 인적 드문 길거리에서 폭행당하는 일이 늘어나는 게 현실이라고 프라이데이는 전했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노숙자 지원이 줄어든 점도 이들을 구걸로 내몰고 있다.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이 끊긴 지난 1차, 2차 대유행 때만 해도 자원봉사자들이 도시락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 확진자가 1000명대로 급증하며 3차 유행이 본격화한 작년 11월 이후에는 피로도가 쌓여 이마저도 줄고 있다고 한다. 노숙자 지원이나 상담을 부탁할 창구도 함께 문을 닫았다.
역설적으로 일본에선 국가와 이웃에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노숙 생활을 한다고 한다. 노숙인을 위한 일본 정부의 생활보호 시스템을 마다하고 길거리 생활을 하는 이들이야말로 자력으로 살아남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프라이데이는 “그 자부심이 있어 길거리의 가혹한 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코로나는 밑바닥 일자리마저 빼앗아 살기 위해 얼마 안 되는 자존심마저 갈기갈기 찢고 있다”고 평가했다.
| 도쿄 인근 요코하마에서 일하는 사회활동가 겸 의사 오치 사치히로가 도쿄올림픽을 반대하는 내용의 작품을 들고 있다. 그는 올림픽 기간 동안 노숙인들이 머무르는 것을 막기 위해 요코하마 경기장 옆 공원에 색색의 원뿔과 장애물이 등장했다고 꼬집었다(사진=AP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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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올림픽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올림픽 야구와 소프트볼 경기가 열리는 도쿄 인근 요코하마 경기장 옆 공원에는 형형색색의 원뿔과 장애물이 등장했다. 올림픽 기간 동안 노숙인들이 머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불편한 건 안 보이게 치우는 식이다. 코로나19 와중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올림픽 개최를 강행한 일본 정부의 우선 사항에 노숙자가 한 몸 뉘일 공간은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