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증기선을 앞세운 서구열강의 압박은 청나라와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향했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만난 조선의 대응은 청나라·일본과는 달랐다. 서구열강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청나라와 일본은 자국의 해군력을 키우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쇄국으로 일관한 채 해군력을 키우기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는 일본의 지배로 이어졌다.
| 신미양요 당시 미국 군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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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프랑스는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인들을 참살한 ‘병인박해’를 빌미로 조선을 침공했다. 프랑스 해군 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은 강화도 문수산성과 광성진, 갑곶진 등을 불태웠지만 정족산성에서 기습을 당해 퇴각했다. 1871년엔 미국 또한 제너럴셔먼호 격침 사건을 이유로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미국은 조선을 개방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조선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과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개항하게 된다. 임규태 박사는 “프랑스, 미국의 압박에도 쇄국을 고집했던 흥선대원군이 일본에 개항을 허락한 이면에는 북양함대를 거느린 청나라의 이홍장의 조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홍장은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힘없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강력한 군사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양무운동을 전개하고 북양함대를 건설했다. 당시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아시아 최강의 함대로 명성이 높았다. 흥선대원군 또한 이홍장의 북양함대 지원을 믿고 외세에 문호를 개방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북양함대는 독일, 프랑스 등에서 철갑함, 순양함, 어뢰정 등을 구입해 만든 신식함대였기 때문에 유지와 군사 훈련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안팎으로 시달리던 청나라의 경제 상황에서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결국 무늬만 아시아 최강함대로 전락했다. 결국 아시아 최강이라는 북양함대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해군에 대패했고, 청나라는 쇄락의 길을 걷는다.
청나라를 굴복시킨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요동 반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팽호 제도를 할양받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요동반도 점령을 꺼렸던 러시아는 독일, 영국과 연합해 일본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는 ‘삼국간섭’을 주도한다.
서구열강의 외교적 압박에 무릎 꿇은 일본은 이때부터 66함대 계획을 수립했다. 66함대 계획은 1896년부터 1905년까지 10년 간 전함 6척, 순양함 6척을 중심으로 대규모 함대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러시아 등 서양열강과의 군사력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한 것이다.
66함대 계획의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1904년 일본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다. 그 이면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의 원조도 큰 역할을 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병탄하기에 이른다.
|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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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박사는 조선이 힘을 키울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의미 없는 논쟁으로 소모했다고 지적했다. 중국과 일본이 북양함대와 66함대를 육성한 반면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부터 1905년 을사조약까지 40년 동안 해군력을 증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조정은 청나라, 러시아 그리고 일본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서야할지 고민하는 눈치외교로 시간을 허비했다고 비판했다.
임 박사는 “조선은 배를 만드는 기술에 뛰어난 무기를 만드는 기술도 있었는데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이어 “미래는 망망대해와 같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고 당부하며 강연을 마쳤다.
|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Ⅲ’ 6강 ‘바다(海) 2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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