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6월 12일자 38면에 게재됐습니다. |
[이데일리 김윤경 국제부장]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말이 됐다. 요즘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 말해야 할 듯하다. 교육과 성공 가능성으로 분야를 좁혀 말해야 할 때는.
이런 상황은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간한 `영어 교육 투자의 형평성과 효율성` 보고서에서도 확인됐다. 2004년 고등학교 3학년 2087명이 수능 성적과 가구소득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부모의 소득이 100만원 늘어나면 자녀의 수능 영어 점수는 2.9점, 수학은 1.9점, 국어는 2.2점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계 월 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의 학생 가운데 영어 사교육을 받는 학생은 20%에 불과했지만 500만원 이상인 가구의 학생은 70%가 영어 사교육을 받는다고 밝혔다. 교육은 그동안 너도 나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노력하는 이가 신분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사다리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들은 "나처럼은 살지 않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자식에 대한 교육열을 불태웠고,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90년대 초중반까지 교육은 누구나에게 계층 상승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했다.
공평하지 않아졌다 하려니 기운이 빠진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때아닌 정의 열풍도 분게 아니었을까.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가능성이 있으며 패자들도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약자들이 보호받으며 그래서 미래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국민들의 인식이 생기는 사회가 바로 정의로운 사회다.
선거의 해를 맞아 정치인들의 입에선 정의와 복지, 평등이란 말이 쉬지 않고 튀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의(正義)에 대한 올바른 정의(定義)를 내리고 진정성을 갖고 임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주사파니 종북이니 하는 공방을 보고 있자니 공허하기 짝이 없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그 정의라는 것이 존 롤스나 마이클 샌델이 말한 `사회 최약체 계층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 혹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면 무엇보다 교육 복지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 교육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상품에 지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꿈을 꾸지 않게 될 것이고 사회 양극화의 간극은 메울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