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잉 그라운드에 선 순간 남편이 캐디들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은 비기너, 저쪽도 비기너, 여기는 오늘 머리 얹는단다. 머리 얹는다는 사람은 5번 아이언과 퍼터 달랑 2개를 양 손에 들고 있었다.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5번홀까지 갔다가 6번홀에서 밀리면 9번홀로 갔다가 다시 6번홀 플레이를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이곳은 인도니까….
플레이어마다 캐디가 따라 다니니 문제 없겠지 싶었다. 그러나 출발하면서부터 삐걱거렸다. 백 없이 아이언과 퍼터 한 개씩 들고 나선 `머리얹는` 골퍼는 캐디가 없었다. 캐디 백 하나당 캐디 한 명이 원칙이기 때문에 캐디를 별도로 붙여줄 수 없다나 뭐라나. 돈은 사람 숫자대로 받아놓고 캐디는 백 숫자대로만 준단다. 참나.
결국 부푼 마음으로 머리 얹으러 나온 새내기는 B여사 남편의 클럽과 캐디를 같이 쓰기로 했다. 남편도 비기너인 터라 B여사 얼굴엔 근심이 어렸지만 정작 비기너 세 사람은 천하태평이었다.
1번홀 출발부터 B여사는 힘겨웠다.
머리 얹는 초비기너의 볼은 완벽한 푸시 샷(똑바로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샷)으로 옆 홀 페어웨이로 넘어갔고, B여사 남편의 볼도 낮게 깔리며 오른쪽 러프 사이를 뱀처럼 기어갔다. 그나마 또 한 명 비기너의 샷은 페어웨이 옆 러프에 걸쳐져 눈에는 보였다.
집중하기 힘겨운 상황, 그래도 B여사의 첫 홀 드라이버 샷은 그런대로 평소 수준이었다.
문제는 페어웨이로 걸어가면서부터 시작됐다. 머리 얹는 분의 걸음은 완벽한 조선시대 양반걸음이었다. 천하태평, 순식간에 마음 조급해지는 B여사는 ‘언제 옆 홀까지 걸어가서 공을 쳐내려고 저러나’싶었다. 캐디가 따로 붙었으면 얼른 뛰어가 집어 오라고 할텐데 캐디를 같이 쓰기로 한 터라 뱀처럼 기어간 남편 공 찾느라 바쁜 캐디를 닦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온통 눈에 거슬렸다. 말을 하고 싶지만 남편에게는 잔소리가 될까, 머리 얹으러 온 사람 주눅들게 할까 싶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매너, 매너… 동반자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도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B여사 눈에 뒷팀 플레이어가 들어왔다. 한국에서 워낙 ‘진행 최우선’ 라운드에 단련되어 있던 터라 B여사는 플레이가 느려져 뒷팀이 기다리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금방이라도 빨간 카트를 탄 진행요원이 불쑥 나타나 노려볼 것 같고, 벌당(벌로 하는 잔디 보수 등) 서는 게 싫은 캐디들이 토끼몰이 하듯 자신을 몰아붙일 것 같아 심장이 벌렁거렸다.
결국 B여사도 비기너가 되고 말았다. 어프로치 샷은 완벽한 뒷땅, 공은 벙커로 향했고 벙커 샷도 뒷땅, 실수 연발이었다. 전날 성공률 80%를 자랑했던 퍼팅감도 꼬리를 감춰 5m에서도 3퍼팅을 했다. 파3인 2번홀도 비슷했다. 뒷땅에 토핑까지…딱 울고 싶은 심정인데 남편은 ‘수준 맞춰주려고 그러나?’ 하며 놀려댄다. 머리 얹는 초 비기너 눈빛도 ‘에이, 별거 아니네’ 하는 거 같았다.
제 플레이가 잘 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던 비기너들의 플레이가 그저 조금 안타까운 정도로 순하게 보였다.
골프가 아무리 매너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하는구나. 아니, 내 골프에 먼저 신경 쓰는 것이 진정한 매너구나. 내 골프는 엉망인 채 동반자 예우한다고 공 찾아주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 조언하는 것은 오히려 에티켓 불량이구나..
금방 조급해져서 갈팡질팡하던 B여사가 오늘 큰 거 하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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