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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폭탄범’ 안경신, 대담한 여자
대형 폭발에 혼비백산한 일제는 사건 이후 몇 개월동안 폭탄범들을 찾지 못했다. 평양 일대가 동요할 것을 우려해 당시 며칠간 보도도 통제됐다. 이듬해 1921년 3월, 대수색을 벌이던 일제는 함경남도 이원군에 숨어있던 안경신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산모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폭탄 투척이라는 거사에 임산부까지 나섰다는 사실에 크게 주목했다. 안경신에는 ‘여자 폭탄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안경신은 생후 며칠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 해 6월 사형을 선고받은 안경신은 재판정에서 “푸른 얼굴에 두 눈에 눈물이 몽롱해 초연한 태도로 퇴정했다(조선일보, 1921년 6월13일)”고 한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장덕진 명의로 ‘평남도청 폭탄은 내가 주도했다’는 취지의 서한을 보내 안경신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와중에 당시 17살로 숭실중학교 학생이었던 김효록이 거사 과정에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는 진술을 뒤집어 안경신은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안경신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김효록은 재판정에서 위증을 한 죄로 6개월 징역을 살게 됐다.
“특별히 느끼는 바는 없습니다. 별로 한 일도 없고 기나긴 세월을 옥중에서 허송했을 따름입니다. 제가 옥중에서 상상하던 바와 달리 세상이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언제나 우리도 남과 같은 빛나는 생활을 하게 될까요? 이후로 과연 어떤 길을 밟아나가야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직 옛날에 가졌던 뜻을 그대로 가지고 나가려 합니다”
독립을 꿈꾸며 임신한 몸으로 폭탄을 던졌지만, 여전히 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탄식하는 듯한 말투다. 그럼에도 40세가 넘은 안경신은 옛날에 가졌던 독립의 뜻을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굳은 태도를 보였다. 당시 세간의 평가대로, 안경신은 ‘대담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