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정치인 윤보선은 유일과 최초 타이틀이 유독 많다. 충청 출신, 서울시장을 거쳤으며, 국무위원을 지내고, 퇴임 후 정계를 은퇴하지 않은 첫 대통령이다. 조선시대부터 6공화국까지를 살아낸 생애도 돋보인다. 여기에 의원내각제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 윤보선 4대 대통령 초상화.(사진=대통령 기록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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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이후 수립한 2공화국(1960년 6월15일~1963년 12월16일)은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체제를 따랐다. 국회는 민주당 정치인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60년 8월13일 윤보선 4대 대통령 취임했다.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시장, 상공부 장관, 3~5대 국회의원을 거친 뒤였다.
대통령으로서 실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내각과 불화했다. 취임 이후 민주당 같은 계파의 정치인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다른 계파에서 임명한 정치인 장면이 1960년 8월19일 국무총리에 오른다. 이해가 다른 대통령과 총리는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터지고 권한을 잃었다. 1962년 3월24일 하야했다.
퇴임 이후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5대 대통령 선거(1963년)에서 박정희 후보와 붙어 2위로 낙선했다. 15만6026표 차이였다. 득표수 기준으로 역대 대선 최소 차이다. 6대 대통령 선거(1967년)에서도 직전과 같은 순위를 결과로 받았다. 표 차이는 116만2125표. 7대 대통령 선거(1971년)는 중도 포기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에서 징역 3년의 집행을 5년간 유예하는 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고, 1990년 7월18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국립현충원 안장을 거부했다. 자신이 투쟁한 독재 정권의 박정희 대통령과 한데 묻히는 게 싫었다고 한다. 훗날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생전에 재심을 받지 못했다.
| 윤보선 4대 대통령.(사진=대통령 기록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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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력가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1920년대 자비로 영국에서 유학한 것이 대변한다. 당숙 윤치호는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숙부 윤치영은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정치인이다. 집안은 친일 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가문에서 창씨개명을 결의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62년이 흐른 올해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했다. 두 사람은 집안은 다르지만 같은 성씨를 쓴다. 윤보선의 윤은 해평에, 윤석열의 윤은 파평에 각각 뿌리를 둔다. 다른 듯하지만 연결고리가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꿨고, 윤석열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났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5대 대선에서 15만여표로 낙선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20대 대선에서 24만7077표 차이로 이겼다. 모두 근소한 표 차이가 가른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