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게 된 궁극적 책임은 당시 국정 최고 책임자였던 김 전 대통령에게 있다. 김 전 대통령도 생전에 외환위기는 자신만의 책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어느 정도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외환위기 때문에 그의 모든 업적을 폄훼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 22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의 공과 과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 경제 구조상 언젠간 터졌을 일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반부터 ‘세계화’를 내걸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금융자율화와 시장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지방투자금융회사를 종합금융회사로 전환하고, 종금사에 외국환업무 취급인가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외환제도 개혁을 통해 외환 관력 각종 규제도 과감하게 풀었다. 이러한 정책은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경제 전문가들은 외환위기의 한 원인으로 당시 한국 경제의 구조를 꼽는다. 김 전 대통령의 정책이 위기를 앞당겼을 수는 있지만, 구조개혁이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는 설명이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3일 “1990년대 초반과 지금은 매우 비슷한 상황이었다”며 “당시 기업부실 처리 등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금융실명제 도입 처럼 과감하게 밀고 나가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OECD 가입을 내세웠지만, 내부는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전 대통령이 구조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것은 한국 경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집권 기간 고도 성장을 이끈 경제 참모들의 보고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에 위기에 적기 대응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새로운 경제 발전의 기틀 마련
김 전 대통령의 경제 성과 대부분은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빛이 바랬다. 그러나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를 통해 정경유착을 끊고 비리와 편법을 잘라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고 입을 모은다.
1990년대 중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활동하며 김영삼 정부를 감시했던 이필상 고려대 명예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과감한 개혁을 통한 비리 구조 청산측면에서는 우리나라 경제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지금처럼 구조조정을 해서 경제체질을 강화했어야 하는 시점었지만, 기본골격을 바꾸지 못했다”며 “이 과정에서 외환자율화 정책 등은 우리 경제의 거품만 키웠고, 결국 외환위기를 잉태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